더펜
 
[역사 History] 
 
작성일 : 15-02-27 14:05
!) 우리는 얼마나 더 쇄뇌당해야 하나?
 글쓴이 : 강희철
조회 : 2,933   추천 : 0   비추천 : 0  
-을사늑약을 을사조약으로 고쳐라.
-일본국왕은 천황으로 바꿔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 사진설명에서 김구를 삭제하라.
 
아시아경제 신문기사 내용:
 
대한민국 국사편찬위원회가 2012년 중학교 역사교과서 검정심사에서 수정권고한 내용이다. 일제의 한국침략을 합법화하고 식민통치를 정당화하는 논리를 국사편찬위원회가 앞장서고 있는 것이다. 광복 70년, 여전히 우리는 일제가 채운 족쇄를 차고 있다. 1945년 일제는 패망했지만 조선총독부 산하 조선사편수회는 아직도 해체되지 않았다. 조선사편수회에서 한국사를 왜곡한 이들이 국사학계를 장악하고 교원양성소를 통해 일제식민사관을 확대 재생산하고 있다.

식민사관은 해방 후 어떻게 주류사학이 되었나?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이덕일 박사의 강연에서 식민사학, 그 실체를 밝힌다.
 
대한민국은 해방 70년이 되었으나 우리의 역사관은 지금까지 계속 일제 식민사관이 지배해 왔다. 이들이 끊임없이 우리의 주체적 사관에 대한 테러에 가까운 공격을 해왔다. 상해에서 쓸쓸히 돌아가신 백암 박은식 선생, 만주에서 돌아가신 석주 이상용 선생, 여순감옥에서 돌아가신 단재 신채호 선생, 이분들에 대한 공격은 해방 7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일본 강경파와 손잡은 친일세력 일진회와 노론당파
105년 전, 우리나라가 망할 때 온 백성들이 울고불고 목숨을 끊고 망명하고 했지만, 나라를 팔아먹은 댓가로 부부동반하여 일본에 가서 자랑스럽게 사진을 찍은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 1908~9년 무렵 친일파들의 행위가 어느 정도까지 이르게 되냐면, 나라 팔아먹는 경쟁을 서로 치열하게 하게 된다. 이 당시 일진회라고 불렸던 친일세력과 인조반정 이래로 250년을 집권한 노론 당파, 일진회와 노론, 양쪽에서 나라 팔아먹기 경쟁에 나서게 된다.
 
당시 일본에는 정치 주류가 두 종류가 있었다. 하나는 이토 히로부미 중심의 문관 온건파가 있고, 또 하나는 야마가타 아리토모 중심의 무관 강경파가 있다. 그러다가 이토 히로부미가 강경파와 손잡고 바로 조선을 점령하자는 합의를 했는데, 석 달 후 안중근 의사에게 하얼빈에서 총에 맞아 죽게 된다. 그후 일본 통감부로 부임하는 인물이 데라우치 마사타케이다. 대한제국을 바로 점령하자는 강경파이다.
 

매국경쟁에 앞장선 이완용과 이인직
그렇게 되니까 이완용이 대단히 급해졌다. 왜냐하면 야마가타 아리토모 계열의 데라우치가 일진회와 손을 잡고 나라를 먹어버리면 우리는 어떻게 되느냐, 이런 불안감이 든 이완용이 비서인 이인직을 시켜서 통감부 외사국장인 고마쓰와 나라 팔아먹는 비밀협상을 몰래 주도하게 된다. 이 비밀협상에서 이완용과 이인직이 가장 알고 싶은 게 뭐였겠는가?
 
‘우리가 나라를 넘기면 우리에게는 뭘 줄거냐?’ 하니까, 통감부 외사국장이 외교부 장관 이었다. 고마쓰가 하는 말이 ‘나라를 넘기면 조선 귀족령을 만들어서 너희들은 조선의 귀족으로 봉해주고 그리고 따로 특별예산을 편성해서 막대한 돈도 주겠다.’ 그랬더니 이인직이 ‘그렇게 관대한 조건이라면 하등 어려울 것이 없겠습니다.’ 라고 말하고 돌아간 뒤 일사천리로 나라를 일본에게 팔아넘기게 되는 것이다.
 
 
이인직 하면 무엇이 생각나는가? ‘대한민국 교과서에서 이인직을 ‘혈의 누’를 쓴 선각자, 이렇게 가르치고 있다. 나라 팔아먹는 비밀협상을 한 매국노를 대한민국의 국사교과서는 선각자로 가르치고 있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것은 혈의 누의 내용은 안 가르친다. 혈의 누의 내용이 뭐냐면, 청일전쟁 때 청나라 군사에게 겁탈당할 뻔한 조선처녀를 일본군이 구해줬다는 내용이다. 이것이 21세기 백주대낮에 대한민국 학생들이 선각자로 알아야 하는 이인직의 실체다.
 

일제로부터 귀족작위를 받은 76명중 56명이 노론
일본에서는 지금으로부터 105년 전, 나라를 점령하고 10월 7일 약속대로 76명에 달하는 조선인들에게 귀족의 작위를 주고 훈장을 준다. 그 중에 왕족들이 있고 당파로 알 수 있는 사람이 64명쯤 된다. 조선의 사색당파로 분류를 해보면 남인들은 한명도 없고 북인은 두 명이고 소론은 여섯 명이고 나머지 56명이 전부 다 노론이다. 250년 동안 인조반정 이래로 집권했던 당파가 조직적으로 나라 팔아먹는데 가담을 한 것이다. 이 후예들이 오늘날까지도 한국사회의 많은 분야에서, 특히 역사학계의 주류를 장악해서 우리 국민들의 역사관에 테러를 가하고 있는 것이다.
 
식민사관의 논리구조
우리가 역사문제에 대해서 논의를 좁히면 일제식민사관의 논리구조가 주로 고대사에 집중돼 있다. 마찬가지로 지금의 중국 동북공정이 일제식민사관의 복사판인데, 마찬가지로 고대사에 집중돼 있다. 그런데 일제 식민사관이 만든 고대사 논리가 무엇인가?

한사군 한반도설을 가르치는 한국 역사교육
한사군은 한강 북부에 있었다. 낙랑군은 평양에 있었다. 그리고 한반도 남부에는 일본의 식민지인 임나일본부가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한반도 북부도 식민지로 시작했고 한반도 남부도 식민지였기 때문에 결론적으로 식민지는 너희 나라의 운명이다. 이것이 일제 식민사관의 핵심이다.

초등학생들에게 한국사를 가르치려면 먼저 무엇을 가르쳐야 되는가?
이순신 장군, 을지문덕, 세종대왕을 가르치기에도 시간이 부족한데, 우리 역사는 식민지로 시작했다고 초등학교 때부터 가르쳤다. 이인직을 선각자로 가르친 그 논리구조, 그 속에서 한사군을 어릴 때부터 주입식으로 가르쳐왔던 것이다. 그러면 과연 그것이 사실인가를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중국은 동북공정에서 만주는 물론 한반도 북부까지 중국사의 영토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 핵심 논거는 한(漢)나라가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설치했다는 한사군(漢四郡)에 있다. 한사군의 중심지인 낙랑군이 고조선의 수도였던 평양 지역에 있었고 나머지 삼군이 한강 이북에 있었으므로 한강 이북이 고대 중국의 식민지라는 주장이다. 그런데 낙랑이 한반도에 있었다’고 쓴 중국 사서는 하나도 없다.
 
 
일제 식민사학자들은 한사군의 낙랑군이 평안남도와 황해도 북부에 걸쳐 있었고 그 치소(治所:낙랑태수부)는 대동강변의 토성동이라고 주장했다. 현재 중국은 이 논리에 따라 한강 이북을 중국사의 강역이었다고 주장한다. 한국의 동북아역사재단의 누리집은 “위만조선의 도읍 부근에 설치된 낙랑군 조선현의 치소가 지금의 평양시 대동강 남안의 토성동 토성”이라고 이들의 논리에 동조하고 있다.
 
일제 식민사학과 중국 동북공정, 그리고 한국 주류 사학계는 낙랑군의 위치에 관해서는 삼위일체 한 몸인 것이다.

먼저 서기 1세기 말경 반고가 편찬한 <한서>의 ‘설선(薛宣)열전’은 “낙랑은 유주(幽州)에 속해 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한나라 유주는 지금의 베이징 일대였다. <후한서> ‘광무제 본기’는 “낙랑군은 옛 조선국인데, 요동에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현재는 만주를 가로지르는 요하(遼河)를 기점으로 요동과 요서(遼西)로 나누지만 과거의 요하는 현재보다 훨씬 서쪽이었다. 현재의 요하를 기준으로 삼더라도 만주 요동이 평안남도나 황해도가 될 수 없음은 물론이다. <후한서(後漢書)> ‘최인 열전’도 “장잠현은 낙랑군에 속해 있는데 요동에 있다”고 쓰고 있다. 고대의 어떤 사료도 낙랑군을 한반도 내륙이라고 쓰지 않았다.
 
 
낙랑군의 위치에 대해 가장 많은 정보를 주는 사료는 <사기> ‘하(夏) 본기 태강지리지’이다. “낙랑군 수성현(遂城縣)에는 갈석산(碣石山)이 있는데 (만리)장성이 시작되는 지점이다”라는 기술이다. 이 사료는 낙랑군에 대해 수성현, 갈석산, 만리장성이라는 세 개의 정보를 준다. 이 세 조건을 만족시키는 곳이 낙랑군 지역이 되는 것이다. 한국의 주류 사학계는 이 수성현을 황해도 수안(遂安)으로 비정하고 있다. 이병도가 그렇게 보았기 때문이다. 이병도의 황해도 수안설은 현재 한국 사학계가 낙랑군을 한반도 내륙으로 비정하는 핵심 이론이기 때문에 그 논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군색함 자인한 이병도 ‘황해도설’
이병도: “수성현(遂城縣)…자세하지 아니하나, 지금 황해도 북단에 있는 수안(遂安)에 비정하고 싶다. 수안에는 승람 산천조에 요동산(遼東山)이란 산명이 보이고 관방조(關防條)에 후대 소축(所築)의 성이지만 방원진(防垣鎭)의 동서행성의 석성(石城)이 있고, 또 진지(晋志)의 이 수성현조에는 맹랑한 설이지만 ‘진대장성지소기(秦代長城之所起)’라는 기재도 있다. 이 진장성설은 터무니 없는 말이지만 아마 당시에도 요동산이란 명칭과 어떠한 장성지(長城址)가 있어서 그러한 부회가 생긴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릇된 기사에도 어떠한꼬투리가 있는 까닭이다. (이병도, ‘낙랑군고’, <한국고대사연구>)”

 
승람은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뜻하는데 이 책의 황해도 수안조에 ‘요동산’이 나오는데 이것이 갈석산이고, 방원진의 석성이 만리장성이라는 것이다. 요동산이 왜 갈석산으로 둔갑했는지 또 벽돌성인 만리장성과 전혀 다른 방원진 석성이 어떻게 만리장성이 되는지는 설명하지 않았다. 논리가 군색하기 때문에 ‘자세하지 아니하나’라는 수식어를 넣은 것이다.
 
진지(晋志)는 당 태종이 편찬한 <진서(晋書)> ‘지리지’를 뜻한다. 황해도 수안을 설명하다가 느닷없이 중국의 <진서>를 끌어들인 것은 그가 ‘수(遂)’자가 같다는 것 외에는 수안을 수성이라고 비정할 아무런 근거가 없다는 고백이나 마찬가지다. 그렇기에 ‘맹랑한 설이지만’이라는 비학문적 수사를 쓴 것이다.
 
현재 중국사회과학원에서 편찬한 <중국역사지도집(전8권)>은 이병도의 주장대로 만리장성을 한반도 내륙까지 연결시키고 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북한은 만리장성 관광단을 모집해서 외화 획득에 나서야 할 일이지만 지난 2천년 동안 평안도나 황해도에서 만리장성을 보았다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낙랑군 수성현을 수안 근처로 표시했으면 갈석산도 그 부근에 그려놔야 하는데 갈석산은 중국에서 한국의 설악산이나 금강산처럼 유명한 산이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만리장성은 한반도 깊숙이 그려놓고도 갈석산은 본래 위치대로 하북성 창려현 부근에 표기해놓았다. 중국측 동북공정 논리의 파탄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당연히 갈석산이 있는 하북성 창려(昌黎)현을 주목해야 한다.
 
갈석(碣石)은 ‘돌(石)로 새긴 비석(碣)’이 있다는 뜻인데 비석을 세운 인물은 진시황(秦始皇)이다. 서기전 1세기에 편찬한 <사기> ‘진시황 본기’ 32년(서기전 215)조는 “진시황이 갈석산에 가서…석문(石門)에 비를 새기게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사기> ‘몽염(蒙恬)열전’은 ‘시황이 장성을 쌓게 했는데 임조에서 시작해 요동까지 이르렀다’고 썼고, 고대 역사지리서인 <수경주(水經注)>는 “진시황이 만리장성을 쌓게 했는데 임조에서 시작해 갈석까지 이르렀다”라고 적고 있다. 고대 중국인들은 갈석산을 요동지역으로 보았던 것이다. 갈석산 부근의 산해관(山海關)이 만리장성의 동쪽 끝이라는 사실은 일종의 상식이다. ‘수성현·갈석산·만리장성’이라는 세 조건에 부합하는 지역은 황해도 수안이 아니라 중국 하북성 창려현이다.
 
창려현에 갈석산이 있고 만리장성이 있다. 그런데 이병도가 낙랑군 수성현을 황해도 수안군으로 비정하기 위해서 인용한 <신증 동국여지승람>의 ‘수안군 건치연혁’에는 “고려 초기에 지금 이름(今名:수안)으로 고쳤다”고 적고 있다. 고려 초에 수안이란 이름이 생겼다는 뜻이다.
 
고산자 김정호(金正浩)는 <대동지지(大東地志)>에서 “고려 태조 23년(940)에 수안으로 고쳤다”고 쓰고 있다. 이병도가 낙랑군 수성현을 황해도 수안으로 비정한 유일한 근거가 수(遂)자인데 그마저 고려 초기에 생긴 이름으로서 아무리 빨라도 10세기 이전에는 ‘수(遂)’자를 사용하지 않았다. 이병도는 황해도 수안현을 낙랑군 수성현으로 둔갑시킨 것이다.

 
조선총독부의 의도는 한국사의 시작을 중국의 식민지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래서 조선총독부는 1915년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를 발간하면서 이 지역을 낙랑군 태수가 근무하던 치소로 확정지었다. 그런 대동강변 토성은 동북아역사재단의 누리집에서 보듯이 한국 주류 사학계에 의해 오늘도 ‘올바른 역사’로 주장되고 있다.
 
주류 사학계는 고구려 미천왕이 재위 14년(313) 낙랑군을 공격해 2천여 명을 사로잡아옴으로써 낙랑군과 한사군이 모두 멸망했다고 보고 있다. 그런데 무신년은 동진(東晋) 영화(永和) 4년(348)이다. 한사군이 망한 지 35년이 지났지만 황해도 지역은 여전히 대방군이 지배하고 있었다는 것은 논리의 모순이 아닐 수 없다. 장무이 무덤은 포로이거나 망명객이었다가 황해도에서 죽은 전직 대방태수 무덤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중국 고대 사서는 대방군을 어떻게 기록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삼국지> ‘위서’(魏書) 한전(韓傳)은 “후한(後漢) 헌제(獻帝) 건안 연간(196~220)에 공손강(?~209)이 둔유(屯有)현 남쪽 황무지를 대방(帶方)군으로 삼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대방의 위치에 대한 최초의 기사는 <후한서> ‘동이열전’ 고구려조의 “후한 질제·환제 연간(서기 146~167)에 (고구려가) 다시 요동(遼東) 서안평(西安平)을 공격해 대방 현령을 죽이고 낙랑태수의 처자를 사로잡았다”는 구절이다. 고구려가 ‘요동 서안평을 공격하여→대방 현령을 죽이고→낙랑태수 처자를 사로잡았다’는 전과를 고려하면 대방은 황해도에 있을 수가 없다.
 
‘군국지’(郡國志)에서도 “서안평현과 대방현은 모두 요동군에 속해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고구려가 공격한 서안평, 대방, 낙랑이 모두 고대의 요동에 있었던 것이다. 대방현이 요동에 있다는 ‘군국지’의 기사 하나로도 황해도로 비정한 주류 사학계의 정설은 설 곳을 잃는다.
 

 
삼국사기 “낙랑군 등 포로 2만명”
봉니(封泥)란 대나무 죽간(竹簡) 등의 공문서를 상자에 넣어 묶은 끈을 봉하고 도장을 찍은 진흙 덩이를 뜻한다. 봉니는 진흙이란 성격상 위조설이 끊이지 않았으나 조선총독부 박물관은 당시로서는 거금인 100~150원을 주고 매입했다. 일제강점기 평양 일대에서만 200여기에 달하는 봉니가 수습되었는데, 북한의 박진욱은 <락랑유적에서 드러난 글자있는 유물에 대하여>(조선고고연구·1995년 제4호)에서 “1969년에 낙랑토성에서 해방 전에 봉니가 가장 많이 나왔다고 하는 곳을 300㎡나 발굴하여 보았는데 단 1개의 봉니도 발견되지 않았다”고 전하고 있다. 운성리 토성·소라리 토성·청해 토성 발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일제가 100원에 구입한 ‘낙랑대윤장’(樂浪大尹章) 봉니는 위조품이라는 결정적 증거다. 전한(前漢)을 멸망시키고 신(新)나라를 개국한 왕망은 ‘낙랑군’을 ‘낙선군’으로 개칭하고 ‘태수’라는 관직명을 ‘대윤’으로 고쳤다. 왕망 때 만들어진 봉니라면 ‘낙선대윤장’이어야 하는데 ‘낙랑대윤장’인 것은 위조품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일제 식민사학자들의 ‘신의 손’을 거친 모든 유적·유물은 의문투성이다.
 
이런 중국계 유적·유물들을 해석할 때 중국계 포로의 존재가 중요하다. <후한서>(後漢書) ‘동이열전 고구려’조는 고구려 태조 대왕이 “요동 서안평(西安平)을 침범하여 대방령(帶方令)을 죽이고 낙랑 태수 처자(妻子)를 사로잡았다”고 전한다. 낙랑 태수 처자뿐 아니라 다른 많은 포로와 여러 문서를 비롯한 노획물도 있었을 것이다. 낙랑군의 호구 수가 기록된 낙랑 목간도 이런 경로로 획득한 문서일 것이다.

<삼국사기>는 미천왕이 재위 3년(302) 현도군 사람 8천여명을 사로잡아 평양으로 옮겼다고 전하고 있고, 재위 14년(313)에는 낙랑군 남녀 2천여명을 사로잡아 왔으며, 재위 16년(315)에도 “현도성을 쳐부수어 죽이고 사로잡은 사람이 매우 많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미천왕이 잡아온 포로만 최소한 ‘1만명+α’이다.
 
<삼국사기> 고국양왕 2년(385) 조는 ““요동과 현도를 함락시켜 남녀 1만명을 사로잡아 돌아왔다고”고 기록하고 있다. 이런 포로들은 탈출을 방지하기 위해 중국에서 가장 먼 평안남도나 황해도에 집단 거주시켰을 것으로 추측된다. 고구려에는 많은 망명객도 있었다.
 
<삼국사기>고국천왕 19년(197년) 조는 “중국에 대란(大亂)이 일어나서 한인(漢人)들이 난을 피해 내투(來投)하는 자가 심히 많았다”고 전하고 있다. 또한 산상왕 21년(217)조에는 “한나라 평주(平州) 사람 하요(夏瑤)가 백성 1천여 가(家)를 이끌고 와서 의지하므로 그들을 받아들여 책성(柵城)에 살게 했다”는 기록도 있다.

황해도 안악군 오국리 안악 3호분의 고분 벽화에는 동수(冬壽)라는 인물에 대한 묵서명(墨書銘)이 나온다. <자치통감>(資治通鑑) ‘진기’(晉記)에 따르면 동수는 연(燕)나라의 왕위 계승 전쟁에 가담했다가 패배하자 곽충(郭充)과 고구려로 망명한 인물이다. 이 명문 기사가 없었다면 안악 3호분도 한사군 유적으로 둔갑했을 것이다.

평남 강서군 덕흥리(현 남포직할시 강서구역 덕흥리) 무덤에서는 요동·현도태수를 지낸 동리( 冬利)라는 인물의 기록도 있다. 장수왕 24년(436)에는 북연(北燕) 왕 풍홍(馮弘) 등이 망명했는데 그 행렬이 전후 80리나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세계 제국의 성격을 갖고 있던 고구려에는 많은 중국인 지배층들이 망명했다. 고구려 강역에서 중국계 유물이 나온다고 무조건 한사군 유물이라고 해석할 수는 없다는 이야기다.

한국 사학계는 조선사편수회의 주요 논리가 그대로 한국사의 정설로 행세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식민사학의 진정한 교주는 이병도의 와세다대 유학 시절 스승이자 만철(滿鐵)과 조선사편수회 출신의 쓰다 소우키치(津田左右吉)다. 일제는 가야를 고대판 조선총독부인 임나일본부라고 주장했으나 거꾸로 가야가 고대 일본을 지배했다는 물증이 속속 드러나면서 현재는 일부 국수주의자를 제외하고는 그런 주장을 하지 못하고 있다.

 
중국이 밑돌 깔고 일제가 못박은 ‘평양’의 한사군
현재 주류 사학계는 일제 식민사학의 구도에 따라 평양 일대를 한사군 낙랑군 지역이라고 비정하지만 일제도 처음부터 그렇게 주장했던 것은 아니다. 조선통감부가 도쿄대 공대의 세키노 다다시(關野貞)에게 평양의 석암동을 비롯한 전축분(벽돌무덤) 조사를 의뢰할 때만 해도 ‘고구려 고적조사 사업’의 일환이었다. 이런 ‘고구려 유적’이 ‘한(漢) 낙랑군 유적’으로 바뀌게 된 데는 도쿄대 도리이 류조(鳥居龍藏)의 역할이 컸다.
 
도리이 류조는 만철(滿鐵)의 의뢰로 남만주 일대에서 ‘한(漢) 낙랑시대 고적조사 사업’을 수행했던 인물이다. 남만주 유적조사를 마친 그는 대동강변에서 중국식 기와를 발견했다면서 이 일대를 낙랑군 지역이라고 주장했으나 별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 유적들이 고구려 유적이라는 것은 일종의 상식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통감부가 조선총독부로 바뀐 후 도리이 류조가 ‘고구려 고적조사 사업’을 ‘한 낙랑시대의 고적조사 사업’으로 개칭하자고 제안하면서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훗날 조선사편수회를 주도하는 이마니시 류(今西龍)도 처음에는 평양 일대의 유적을 고구려 유적으로 보았으나 총독부의 방침을 알고는 태도가 달라졌다.
 
이후 이마니시 류는 가는 곳마다 2000년 전 한나라 시대의 와당과 봉니(封泥)를 발견하고 2000년 전에 세웠으나 그간 아무도 보지 못했던 ‘점제현 신사비’를 최초로 발견하는 ‘신의 손’이 되었고 평양 일대는 낙랑군 유적이 되어갔다. 한국사의 식민지성을 강조해 일제의 식민지배를 합리화하기 위해서였다. 해방 7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의 눈이 아니라 타자의 눈으로 그린 것을 한국사의 시작이라고 가르친다면 후세에게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출처: 한가람 역사문화 연구소장
 

식민사관의 논리구조 임나일본부
이병도의 스승 쓰다 소키치라는 식민사학자가 임나일본부를 살리려면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다 가짜로 몰아야 되겠다 이런 발상을 하게 된다. 그래서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을 발명하게 된다. 삼국사기에 기록돼 있는 왜(倭) 혹은 왜인 기록대로라면 임나일본부가 존재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국립중앙박물관, 최근까지도 원삼국실이라는 게 있었다. 원삼국실이 뭐냐면? 이 식민사학자들 머릿속에 3세기 4세기에 백제 신라는 없었다. 있어도 조그만 부락이었다. 그러니까 신라 백제란 말을 쓰지 않기 위해서 원삼국론이라고 써놓은 것이다.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BC18년에 온조 임금이 백제를 건국했다’ 라고 기록했다. 그런데도 국사교과서에서는 3세기 중엽 고이왕 때 백제가 건국됐다고 주장하는데 그 근거가 무엇인가? 이병도는 “나의 연구한 바로는 엄밀한 의미의 백제의 건국은 온조로부터 제8대 되는 고이왕 때 되었다고 믿는 바이다. 고이왕 이전은 부락정치 시대에 불과했을 것이다.” 라고 해서, 자기의 스승 쓰다 소키치가 이야기한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에 따라서 백제사 400년을 전부 다 날려버린 것이다. 이것이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조선총독부는 1945년 8월에 해체 되었지만 조선총독부 산하 조선사편수회는 전혀 해체되지 않고 그대로 주류대학 국사학과, 국사관, 국사교원양성소를 장악하여 주요대학 국사학과와 국사관에서 일제 식민사관을 반복해서 확대 재생산하고 가르친 결과 초등학교 때 한사군에 대한 이야기를 배우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는 해방됐지만 우리 역사는 지금도 조선총독부 산하 조선사편수회에서 가르치는 내용을 그대로 교육 현장에서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보니 이들로부터 세례를 받은 동북아역사재단, 국사편찬위원회, 뉴라이트라 말하고 있는 식민지근대화론, 이것이 왜 문제인가?
 
일제 식민사관의 주요한 논리 중에 하나가 정체성론(停滯性論)이다. 정체성론은 우리 역사는, 한국 역사는 전혀 발전하지 못하고 정체되었다. 그래서 삼국시대 때부터 19세기까지 상태가 똑같았다. 한국인들은 자발적으로 사회를 발전시킬 능력이 없기 때문에 외국의 식민지배를 받아야만 발전할 수 있다. 그래서 이병도가 한사군을 극찬하는 논리가 나오고, 21세기 백주대낮에 ‘식민지 시대에 근대화가 되었다’라고 주장하게 되는 것이다. 일제 정체성론에 따르면은 우리는 해방 이후에 지금쯤 다 굶어 죽었어야 됐다. 지금 우리사회가 이렇게 발전한 것과 저 식민사관과는 맞지 않는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법학, 음악, 미술, 국문학 등 조금 공부해보면 전부 다 일제 통치에 영향을 받았다. 우리는 해방 이후 70년이 되는 지금까지도 한번도 종합적으로 연구검토한 적이 없다. 이걸 연구 검토해가지고 받아들일 점이 있으면 계승하고, 버릴 점이 있으면 철저하게 버리는 작업을 해야 되는 게 첫 번째다.
 
두번째로 한국사 관련 국가기구에서 우리가 낸 국민의 세금을 가지고는 식민사학 하려면 하지 말라는 것이다. 일본에 가서 자민당 돈을 받아서 해야지. 일본에 가서 일본 극우파 돈을 받고 중국에 가서 중국 패권주의 공산당의 돈을 받아가지고 식민사학을 하라는 것이다.
 
왜 우리 대한민국 국민의 세금을 가지고 식민사학을 하느냐는 이야기다. 이제는 식민사관 비판에서 그칠 것이 아니라 이들이 장악한 한국사 관련기구를 해체, 재편하여 한국사를 한국인의 시각으로 재구성해야 할 때다. 이것은 좌우의 문제도 아니고, 여야의 문제도 아니고, 우리가 한국인으로서 21세기에 순국선열의 피와 한을 발전적으로 계승하는 21세기의 자랑스런 대한민국을 만들기 위해서 가장 기초적인 사안인 것이다. 출처: ⓒ 월간개벽.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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