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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3-04-28 22:24
충무공 탄신일을 맞이하여
 글쓴이 : 곽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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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공 이순신. 2010/04/28 10:15 추천 3 스크랩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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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조선이 낳은 위대한 수군제독 충무공 이순신을 모르는 한국인은 없을 것이다.
500년 지난 지금에도 한국 정치계는 충무공 어록"생 즉사 사 즉 생"을 즐겨 인용한다. 심지어 대선에서도 공의 憂國衷情을 선거전략에 무단히 이용하고 있다.
 
 
임진왜란이란 사상초유 국란(國亂)7년을 당한 조선은 통치자 자질이라곤 눈 꼽만치도 없는 임금 선조와 국운이 풍전등화 같은 때에도 당파싸움질에 여념 없이 당쟁으로 날을 지세는 조정 고관들 모습에서 오늘날의 정치현실를 보는 것 같아 그 당시 歷史現場에 있던 인물을 재조명해 보는 것도 지금의 祖國을 더 나은 방향으로 개선하는 한 방법이 아닐까?
 
 
어리석은 所見으로 수군 통제사 충무공 이순신의 임진왜란 전쟁서의 업적을 복원(復原)해 본다.
 
 
사이코 기질의 선조. 왜란대비10만 양병설 주장한 유성룡. 조선통신사 사절단부사(使節團副詞)로 왜국에 건너가 1년이나 체류하며 조선침략 전쟁준비를 보았을 터에도 사실과는 다른 보고로 왜의 침략에 방어마저 소홀케 한 동인 김성일. 아마추어 수군통제사 원균. 안하무인의 명 장군 진린. 등 인간성과 국가 전란시 조선조정 대처를 살피며 충무공의 偉大한 업적을 기리는 바이다.
 
 
이순신(AD.1545~1598)의 자는 여해, 을사년(음 3/8일)인종 1년 어머니는 초계 변씨 아버지는 정으로 서울 건천동 덕수 이씨 4형제 중 3째로 태어났다.
 
 
임진왜란 발발직전에 이순신을 천거, 전라좌수사로 임명하여 조선을 왜적의 침략에서 구한 재상유성룡(1542-1607)과는 3살터로 어렸을 때 순신과 한동네서 자랐다. 유성룡은 순신에게 왜(倭)의 간사함을 말하며 경계를 늦추지 말 것을 주문했다.
 
 
이순신 난중일기(亂中日記)에는 조선 백성은 열에 여덜, 아홉은 비겁하다 했으니, 용감한 사람이 간혹 있다고는 했으나 조선인을 거의다 비겁자로 본 것은 조선백성기질을 충무공은 예리하게 투했다.
 
 
비겁하다는 건 용기가 없다는 뜻으로, 판단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조선人은 판단이 약해 잘 속고 사기잘 당하는 기질로, 무엇이 오른 건지 몰라 갈팡질팡 하는 게 어제.오늘 일이 아니라 옛부터 그랬다는 걸 考證이 말한다.
 
 
좌파정권10년에 호남향우회의 감시. 간악한 술수와 박해를 받으며 정말 조선사람 속성(俗姓)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는 회의적인 생각을 한 것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래도 이순신은 그런 조선백성을 불쌍히 여겼다. 자비라는 박애정신으로 인류(人類)를 한차원 높이 이끈 世紀의 현자. 성현들과 조금도 다름없는 위대한 인간품성을 가졌던 것이다.
 
 
인류를 좋은 방향으로 이끈 인물은 존경받아야 하고, 조국를 배반한 반역자는 척살시켜야 비로서 나라가 바로 서는 것이다. 지난 역사를 통해 우리가 배우는 것은 악인이 득세해 아무도 바른 소리하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을 때, 그 나라의 종말( 終末)이란 사실이다.
 
 
순신이 어렸을 때 가세가 기울어 충남아산 지금 현충사 자리로 이사했다. 21세 보성군수 지낸 방진의 딸과 婚姻 22세부터 사서오경과 병법서를 읽고 무예를 연마했다. 문무겸전하나 시운을 얻지 못해 그 당시론 좀늦은 나이인 32세 무과4등으로 급제했다.
 
 
이순신은 헛소문과 적의 간계는 본능적으로 간파하는 통찰력을 가졌다. 일상생활에서 명상과 사색으로 고독하게 지냈으며 연결해서 사고하는 간파력이 우수했다. 
 
 
그런 충무공이 난중일기에서 왜놈은 간사해 그 말을 믿을 수 없다고 여러번 기술했다.
이순신은 활쏘기를 좋아해 자주 연습했다. 난중일기에 오열. 몸살이 잦아 병고에 시달렸으니 나이40 넘어 무예를 과하게 단련하면 안쓰는 근육을 건드려 몸이 아플 수밖에 없다.
 
 
해전서 활의 역할은 대단히 중요했다. 왜적의 조총, 사살거리는50m정도다. 조선수군 활 유효사정 거리는 70m. 조선수군의 대포 사정거리는400m다. 해전서는 조총보다 활이 더위력 있었다. 이순신은 부하들과 혹은, 혼자 시간 나는 데로 거의 매일 활쏘기를 개을리 하지 않았다.
 
 
안하무인인 明나라 장수 진린에게는 무장의 禮와 전투력으로 승복시켰다. 임진왜란 마지막 전투인 노량해전에서 진린과 서로 돕고 합심하여 불리한 여건서 왜선을 격파하고 대승리로 이끌었으니 세계 해전사에 유일 무일한 일이다.
 
 
당시 남해는 산림이 울창하고 노루와 사슴이 많고 물고기도 많이 잡혔다. 특히 청어가 많았다. 조정서 군량미, 보급이 오질 않아 조선수군은 농민이었으니 군사들이 농사짓고 고기 잡아 자급자족했다.
 
 
 
난중일기엔 밤에 함선이동을“달빛을 타고 갔다!”라 기술했다.
 
 
남해바다 만월(彎月)의 달이 휘어~ㅇ청 뜬 밤, 잔잔한 파도 위에 배를 타고 나아가면 정말 달빛을 타고 가는 것 같으니, 5세기前. 사람 충무공 이순신의 정서와 시문에 새삼 감탄치 않을 수 없다.
 
 
당시 조선수군 배론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는 항해 할 수 없었다. 이순신 가문서 후세에 걸출한 인재가 많이 배출됐다. 역대 임금. 황후 제삿날은 휴일이고 제삿날에는 고기를 먹지 않았다.
 
 
동서양 막론하고 수많은 위인과 영웅을 역사(歷史)속에서 만났으나, 조선시대의 어려운 악조건서 이런 걸출한 인재. 위대한 인물 탄생은 어느 시대도 없는 전후 후무한 일로서 진정 우리민족의 복이다.
 
 
영남우수사 이억기(1561-1597)는 순신의 수하로 용감한 장수다.(칠천량 해전서 전사)1596.2.30. 우수사 이억기의 마음가짐이 흩으러 진 것을 보고 우수사 수하를 곤장 치리한 뒤 3일후 사람을 보내 미안하다고 전해 부하장군 마음을 풀어줬다. 5일후 우수사 이억기에 무엇을 잘못했는가? 설명하자 이억기는 자세를 가다듬고 마음으로 승복했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의 원인(原因)과 배경을 살핀다면,
1590년 倭의 장수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 수길1536-1598년)가 나이55세에 일본 최초 자국통일을 이룩했다. 2년 뒤1592년(선조25년)명나라 정벌 명분으로 조선을 침공, 임진란을 일으켰다.
 
 
당시 일본의 사정은 전국시대 내전서 통일은 이룩하나 경제공황이 왔다. 평시도 화산으로 생성된 왜의 국토는 농경사회로서 어려움이 많았던 터, 百年內戰으로 국토는 더욱 황폐해져 민간생활은 말이 아니었다. 내전서 돌아온 수십만의 무사들은 일본전국을 휩쓸고 다녔다. 무사계급도 기근에 굶어죽는 사람이 비일비재했다.
 
 
민가에선 연로하여 노동력 없어진 노인은 자손이 간소한 잔치 끝에 산속에 갔다버리는 풍습이 있었다. 식사가 조밥에 메실장아찌 정도다. 제대로 먹지 못해 발육이 정지, 西. 南海노략질 오는 왜구의 왜는 작은 왜자로 조선인보다 평균키20~30㎝작았다.
 
 
그러나 무사도가 창궐하여 창. 검술은 숙련됬다. 무사계급이 되는 것 만이 출세의 유일한 길이었다. 포르투갈서 조총 신무기를 들어와 그 사용법을 익혀 전쟁에 활용해, 국력과 상관없이 명나라도 정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당시 명나라황제는 제13대 신종이다.
당시 조선은 14대 임금선조. 덕흥대원군 3째 아들. 서출계통 혈통인 후궁자식이 낳은 아들이 적통 이은 첫번째 임금이다. 도량이 좁고 편협해 국정을 원칙에 의해 처리하지 않고 감정에 따라 결정하여 통치자자질이 전혀 없는 임금이었다.
 
 
 
강직한 성품의 이순신과는 맞지 않아 당파 싸움질하는 소인배의 중상과 모략을 끊임없이 받고 그들 참소에 귀기울인 선조로 인해 우리 민족사상 가장위대한 영웅을 힘들게 했다.
 
 
1587년 규슈정벌에 성공한 히데요시(풍신수길)는 內戰으로 단련된 수십만의 군사를1590년 쓰시마에 집결시켰다. 쓰시마는(대마도)한반도와 일본 규슈사이 바다에 있는 섬으로 6개 유인도와 70개 무인도로 이루어져 있다.
 
 
자국내 혼란을 외부로 발산 않으면 해결할 수 없었던 왜의 사정이 조선을 침략 壬辰란을 일으킨 원인과 배경이다. 이는 국가는 기강이 허물어지면 망하기 때문으로, 왜는 명을 칠테니 길을 빌려 달라며 조선에 사신을 보냈다.
 
 
조선 조정은 동인과 서인이 당파싸움으로 정신없는 중에 서인황윤길을 정사로 동인김성일을 부사로 하는 통신사를 왜에 보냈다. 왜에서 1년 만에 돌아온 사절단부사 동인김성일은 장차 조국이 당할 엄청난 재난은 생각지 않고 당쟁 시각에서 사실과 다른 엉터리보고서를 조정에 제출, 조선이 아무방비 없이 임진란을 겪게 했다.
 
 
다행이 천운으로 임진왜란 14個月 前, 재상유성룡 천거로 이순신은 정3품 전라좌수사로 임명하니 부임즉시 왜의 침입을 예상한 이순신은 조선수군 주력함 판옥선을 건조했고 군관나대용을 시켜 거북선을 만들어 왜 침략에 대비했다.
 
 
거북선은 문헌에 고려 때부터 있었다하나 인재란 없는 걸 창조하는 게 아니라 있는 것 중에 아무도 관심두지 않는 것에 창안.국가 백년대계 초석을 세우는 것이다.
 
 
거북선.
 
거북선은 판옥선에 한층(一層)더 얹어 지붕 역할하는 뚜껑을 만든 것이다.
앞엔 용두를 달아 입속에 대포를 장착하고 등은 쇠못을 꼽아 크기는 판옥선과 같다(어떤 문헌에는 거북선 길이35m. 너비10.6m. 높이6,6m 노의 수 각8~10개.돛 2개. 승무원 110~`130명).상갑판 밑 중 간판에 좌우 각6문 대포를 설치했다. 정원160명에 100명은 노 젖는 격군이고 24명이 포수.10명이 화포장. 18명이 활 쏘는 사수다.
 
 
거북선은 3층으로 왜적이 부산포항에 도착하기 이틀전에 완성됐다.
 
 
2개의 돛대는 세웠다 눕혔다 했으며 장거리 항해 순풍엔 돛대을 사용하는 범선이나, 전투시는 돛을 접고 격군이 노젓는 켈리선이다. 당시 조선은 의무 병역제로 노 젓은 격군을 일이 힘들고 봉급은 없어 툭하면 도망치다 잡히면 본보기로 효수했다.
 
 
거북선은 돌격선으로, 해전초기, 적선단 복판에 침투해 왜선과 충돌하여 격침시키고 각종대포 발사로 기선을 제압. 아군사기를 북돋아 해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판옥선과 거북선은 소나무 통골조로 두께 13㎝판재로 건조했다. 나무에 홈을 파 끼워 맞추기식 공법을 사용. 나무가 물에 젖어 팽창하면 더욱 단단히 결합되어 조선 수군선단 맨앞서 좌충우돌로 적선을 향해 돌진해 파괴하는 돌격선 역할을 충실히 했다.
 
 
왜의 전함(戰艦)아다케 부네(안택선).세케 부네. 고바야 등은 격군 없고 대형전함(大形戰艦)아다케 부네도 전투원만 300명의 주력전함이다. 삼나무 두께 9m판재로 만들어 조선판옥선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하고 간판 높이도 낮아 왜병이 조선주력함 판옥선에 기어오르지 못했다. 왜선은 병력을 수송하는 수송선과 연락선이 주임무로 만들어져 돛으로 항해하는 범선이었다.
 
 
범선은 해전(海戰)을 치르자면 풍상(風尙)의 위치(位置)를 점해야 했다.
 
 
풍상의 위치란 배 돛뒤서 바람을 받는 위치를 말한다. 풍하위치(風下 位置)에 서면 돛정면으로 바람을 받아 전진할 수 없어, 공격의 적당한 시기를 얻지 못해 범선해전(帆船海戰)은 풍상 위치를 점하는 쪽이 승리확률30% 더 잡았다.
 
 
그만치 풍상의 위치는 중요했다. 그러나 조선수군 주력함은 배 중창에 격군이 노젓는 켈리선이라 배에 동력을 단것이나 마찬가지로 바람 의지로 움직이는 왜선과는 절대적으로 비교할 수없이 해전서 유리했다.
 
 
전라좌수사는 현 여수시 오동도다. 이순신은 출전에 앞서 철저한 정보수집으로 적의 태세가 완벽하면 승리 할수 있는 장소로 유인해 적을 공격 백전백승(百戰百勝)했다.
 
 
임진왜란 7년 전쟁.
 
 
선조25년(1592년)임진년4.14일 규슈 나고야 대본영서 왜군군대는 1~ 16조로 편성. 병력 28만6천명. 총대장은 우키다 히데이로 왜란 7년 전쟁의 시작이었다.
1592.3.13일 나고야서 출정하여 중간기착지 쓰시마에 집결, 4.13일 AM6시 쓰시마를 출발 PM6시 부산포 앞바다에 도착했다.
 
 
동래 경상좌수사 방흥은 왜군 엄청난 군세에 놀라 조정에 파발마를 띄우고 도망치나 군인으로서의 자존심을 잃어 그 이듬해 병들어 죽었다. 삼천포수영 경상우수사 원균은 왜군 대병력침입 소문에 전선100척 대포와 군기를 스스로 파괴하고 바다에 버려 수군 일만명을 무너지게 하고 판옥선3.4척을 몰아 도망쳤다.
 
 
경상 우병사 동인 김성일은 조정에 보고하기를 왜구가 적선 400척에 한배에 수십 명씩 타 병력 일만 밖에 안 된다고 통신사부사 때 허위보고 버릇을 못 버려 거짓보고를 조정에 올리고 수하병사들에게 재주껏 알아서 도망치라 이른후 3.4일 뒤 병사들 몰래 도성을 빠져나가 도망쳤다.
 
 
이순신은 왜군이 부산포에 상륙했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산하장수들을 좌수영에 소집했다. 탈영하다 잡힌 황옥천을 효수한 뒤 참모회의(參謀會議)를 열었다. 녹도만호 정운은“적군을 치는데 전라도 경상도가 어디 이느냐 !”일갈, 전라좌수영 수군참전을 주장했다.
 
 
이순신은 첩보의 중요성을 아는 장군이었다. 즉시 염탄꾼을 적진에 보네 적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다.
 
 
제 1차 출정 1592.5.4일 오전2시 출발,
1.옥포해전(5월7일)함포 해전. 적진포 해전서 왜적함대를 파괴하여 왜적의 수급을 베고 승리했다. 이순신은 작전해역의 사정과 적진을 정확히 파악했다. 자신이 원하는 곳으로 적을 유인하고 철저한 공격으로 왜함 파괴전략을 썼다.
 
 
제2차 出征. 당포해전. 사천해전. 당항포 해전에서 승리 - 거북선이 처음 출동한 율포 해전서 적을 섬멸 했다. 이순신은 해전 중에도 백성을 불쌍히 여겨 쌀과 포목 등을 나눠주고 함선에 태워 후방지역으로 이주시켰다. 임진왜란 삼대첩 하나인 한산해전서 승리. 응포해전 앞서 경상우도 순찰사 동인김성일이 도망쳤다.
 
 
한편 육지에선 이광의 군사5만이 왜군1600명을 이끌고 기습 공격한 敵將자가야스 하루 에 의해 패배하고 각지로 흩어졌다. 火砲匠人 이 장손이 비격진천뢰를 발명하다. 이순신의 거북선과 함께 임진왜란 양대 신무기다.
 
 
이여송이 12월25일 明군 4만 2천을 이끌고 參戰했다.
1593.계사년.
권율은 행주산성에서 비격진천뢰와 조선군2300으로 왜군3만 대군을 격파했다.
 
 
1593.2월 이 순신 함대 제5차 출동.
1594. (갑오년 기근)백성들 참상 極甚. 서로가 사이를 잡아먹었단 기록이 있다.人肉먹는 게 아무렇지도 않게 됐다. 선조1597.3.왜군14만 大軍증원, 재침하니 정유재란이다.
 
 
아마추어 水軍提督. 경상우수사 원균.
원균은 몸통이 비대해 1 끼 식사로 밥 1말. 생선 5묶음 닭이나 꿩 3.4마리를 먹었다. 배가 무거워 도망도 잘못했다(조경남 난증잡록)
 
 
1594. 임진왜란 3년 선조 27년3월6일 당항해전 격전의 공을 원균이 가로 챈다 .서인대신에 뇌물을 보내 이순신을 모함했다. 선조는 원균참소에 동조했다. 원균 활솜씨도 형편없었다.
재목(材木)이 못 되는 인재(人才)는 평시는 그럭저럭 때우나 戰爭이나. 국가위급 시는 그 자질이 여실히 들어날 수밖에 없다. 뇌물로 고관들을 매수한 원균은 수군통제사자리를 차지하나 옆에서 볼 때는 쉽게 보인, 바다에 나가기만 하면 勝利할 것 같았던 倭와의 전투는 아마추어 수군장수 원균으로는 감당키 어려웠다.
 
 
이순신이 해전서 連戰連勝할 때는 그만한 작전과 전투력으로 승리를 점하나, 원균은 삼군통제사가 되자 유능한 장수들은 갈아 치우고 맹종(盲從)하는 신하로 채워 주색잡기로 세월 보내며 이순신과는 정반대의 치세로 파멸했다.
 
 
통제사 직분 맡아 4개월 채지나지 않아 조선수군 함대를 전멸시키고 자신은 倭병에 목 베임 당해 죽었다.
 
 
이순신 장군 옆에 가만히 있었으면, 그냥 왜란진압 일등공신으로 남았을 터. 헛된 공명심에 임진왜란(壬辰倭亂)사를 보는 後世들로 하여금 이순신 위대함에 비해 정반대의 악역. 만고역적 원균이 됐다. 고위직에 앉았다 해서 다가 아니라 무능(無能)으로 국난해결(國難解決)의 열쇠를 열지 못하면 아니함만 못한거다.
 
 
명나라서 불로 적을 공격하는 소이탄1530개를 보냈는데 원균이 흉계를 꾸며 독차지 하려했다. 第2차 당항포해전서 원균은 언어를 제어 못해 함부로 무리한 말을 했다. 원균이 서리처를 간통(姦通)하려하나 그 妻가 악을써 불발에 그 쳤다는 소문이 수군들 사이에 퍼졌다.
 
 
 
권율 도원수에게 전투거부 항명(抗命)으로 원균은 곤장을 맞고 칠천량 해전서 패해 도망치다 倭兵6.7인에 포위당해 칼 맞고 죽었다. 칠천량 해전서 군선256척과 수천명 조선수군(水軍)을 죽음에 몰아넣었다.
 
 
원균 모함에 걸려 의금부에 갇혔다 방면된 이순신이 권율장군 밑에 백의종군하다 삼도 수군통제사로 임명된 원군이 칠천량 전투에서 대패하자 선조는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했다.
 
 
그 첫 해전(海戰)이 명량해전이다. 원군 패전으로 조선수군은 거의 괴멸되다시피 되어 남은 배가 판옥선 한척과 중선11척. 어선 한척이 조선수군 전함대였다.
 
 
선조(1552-1608)조선 第14代 임금.
 
 
중종의 후궁 창 빈 이씨 아들 덕흥 부원군의 셋째. 1567년 명종이 후사 없이 죽자 후궁소생 첫번째 임금이 된다. 군주자질(君主資質)이 안 되는 선조는 국정을 깽판治世로 보내다 末年임종뒤 독살설(毒殺 說)이 있는 것으로 보아 除名에 못 죽은 것으로 보인다.
 
 
 
의병장 곽재우가 벼슬을 사양 한다고 귀양 보낸 선조의 행적은 공신선정(功臣選定)과정도 일괄성(一括 成)이 없어 선무공신 무관18명 문관 86명에 곽재우(1552~1617).고경명. 김천일. 김덕룡. 등 의병장(義兵 將)들의 빛나는 전공은 다빼고 반면 내시(內侍)24명이 피난길에 동행(同行)했다하여 공신반열(功臣班列)에 넣었다.
 
 
선조는“원균의 敗戰은 하늘이 그렇게 만든 것이라”庇護. 조선수군을 괴멸시킨 원균에게 1등 공신을 하사했다. 정통성이 부족한 선조는 비겁자만이 자기 경쟁상대(競爭相對)가 될수 없다고 판단(判斷)한 것 같았다.
 
 
(1597. 유성룡 정비록)명량해전 승전첩보가 조정에 날아들자 선조는 “이순신은 사소한 적을 잡은데 불과하다. 자신의 직무를 이행했을 뿐 큰공 세운 것은 아니다" 며 이순신에 벼슬을 올려주지 않는 다른 방법으로 상주는 것을 강구하라.”말했다.
 
 
선조는 상식을 무시한 이상성격소유자로 이순신이 노량해전서 죽기 전까지 수많은 해전서 승리하고 3번이나 적탄 맞고 분투하나 선조는“이순신을 반드시 죽여 없애야 하다”며 공로가 클수록 용납하질 못했다.
 
 
인재확보를 위해 조정의 허락 받고 과거를 보는 등. 이순신 치적은 한이 없었다.
광해군(1575년-1641)은 왜란 중에 지방을 돌며 군대를 모집하는 등 구국의 공로가 많으나 선조의 업보를 받았다 밖에 볼 수 없어, 광해군이 조선第15대 왕에 등극하나 인조반정으로 실각. 귀양가 죽었다.
 
 
옥포 해전(1592년 5월7)사천해전(1592-5.29)당포해전(1592.6.1)당항포 해전(1592년6.5)을포해전(1592.6.7일) 한산도 해전 등, 이 모든 해전(海戰)서 왜병선단(倭兵船團)을 격파(擊破)하고 승리했다.
 
 
1592.7.5 한산도海戰. 헐버트(hul bevt. he)는 이 해전(海戰)은 “조선의 살라미스 해전(海戰)이다” 評했다.
 
 
살라미스는 그리스만 서쪽 섬으로 BC.480년 그리스해군이 페르시아 해군을 극적으로 격파한 전설적 해전(海戰).
 
 
세계의 많은 해군 사관학교서 세계4대 해전(海戰)으로 살라미스 해전. 칼레 해전. 들라 팔가 해전. 한산도 해전(海戰)을 꼽았다.
하루 뒤 이순신수군은 안골포해전. 부산포 해전(海戰)서 승리했다.
 
 
1596년 10.12~30 체포되어 97년 1.1일~ 3.30일까지 원균 모함에 하옥되고 4월 사면되다. 그 동안 이순신 처리문제로 어전회의가 7차나 열렸다.
7.21일 칠천량해전(海戰)서 원균이 대패하고 백의종군하던 이순신은 삼군통제사로 재임명 되다.
 
 
1597.9월16일 명량해전(海戰).
9월15일 조수를 타고 해남군 문내면 우수영으로 진을 옮겨 전라우수사 김억추 에게 수중철색을 치게 했다. 울돌목은 다른 말로 명량이다.
 
 
우수영쪽 해안과 진도해안 양쪽서.남해안 전체서 물살이 가장 센(유속10노트)좁은(폭300m)해협에 비스듬히 수중철색을 걸었다. 왜적 배가 서로 부딪쳐 깨지도록 조류이용 전략을 세웠다. 좁고 빠른 유속의 흐름 밑에 쇠줄(수중 막개장치)을 설치. 왜선(倭船)들이 걸려 서로 부딪쳐 침몰했다.
 
 
풀어놓은 염탐 선을 통해 왜선이 공격해온다는 정보를 입수해 대해전(海戰)이 벌어질 전날 밤, 수군장병들을 모아놓고 이순신은“兵法에 이르기를 전쟁에 임해 살고자 하면 죽고 죽을 각오를 하고 싸우면 반드시 산다.”는 훈시로 군령을 세워 내일의 전투에서 유감없이 싸울 것을 명했다.
왜군133척이 명량앞 바다 울돌목에 쳐들어오자 이순신은 조선수군13척을 이끌고 해전에 임했다.
 
 
명량해협의 지형과 조류를 사전에 연구해 왜함선을 향해 죽을 각오로 돌격하니 조선수군 배가 뒤따르질 않았다.
 
 
왜 함대(倭 艦隊)의 군세에 비해 이순신 수군병력은 너무나 미약 두려워 기회(幾回)만 생기면 도망치려 거리(距離)를 두고 있었다. 가장 가까운 거리의 거제현령 안위를 이순신은 초요기(군령 전하는 깃발)로 불러 배위에 서서 소리높여 거제현령 안위에게
“네가 군법(軍法)에 죽고 싶으냐! 여기서 싸우지 않고 도망친다고 살것 같으냐!”질타했다. 뒤따라 도착한 중군장(中軍 長)김응한 에게도 그리했다.
 
 
거제 현령안위와 중군장 김응한이 죽을 각오로 왜선(倭船)을 향해 돌격하자 왜 사령선과 적선 두척에서 왜병이 개미 떼처럼 두 배에 달라붙었다.
 
 
이순신의 판옥선이 다가가 대포와 화살을 쏘며 왜병을 사살하고 그들을 구했다. 곧이어 녹도만호 송여립과 평산도 대장 정응두가 달려와 전선에 힘을 합치니 조선수군이 사기 백배(士氣百倍),전력(全力)을 다해 용감히 싸웠다.
 
 
敵將마다시가 이순신의 화살을 맞고 바다에 빠졌다. 갈고리로 걸어 올려 목을 베 돛대에 메달자 왜병의 사기가 저하(低下)됐다. 왜선(倭船)들은 수없이 파괴되고 적병들은 물에 빠져죽어 패색(敗色)이 짙자 나머지 왜선은 도망쳤다.
 
 
명량대첩은 13척 전선(戰船)으로 왜함332척을 쳐부순 세계해전사상 유래(世界海戰史上 )없는 작은 병력으로 많은 적군을 쳐부순 해전사(海戰 史)다.
 
 
1598년 무술년(11.18일~19일)노량해전,
남해 노량 앞바다 겨울 북서풍 차가운 날씨에 倭船550척과 朝. 明200척의 연합함선(聯合艦船)이 마지막 도주하는 왜적을 섬멸하려 해전을 벌렸다.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이순신將軍은 明나라 장군진린과 서로 돕고 도우면서 왜선격파(倭船擊破). 倭 艦 를 노량해협에 수장시켰다.
 
 
이순신은 왜적과 관음포 激戰중에 손수 북을 치며 수군을 독려하다 날아오는 총알에 겨드랑에 맞고 쓸어졌다.
 
 
장군은 유언으로“싸움이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맏아들 회와 조카 완이 임종을 지켰다.이순신이란 偉大한 조선의 별은 관음포서 떨어지나, 공의 구국충정(救國忠情) 魂은 조선인(韓國人)가슴에 영원히 살아있다.
 
 
관음포: 경남 남해군 고현면 차현지 이락사에 이순신 장군(將軍)사당과 유품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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