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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5-03-07 12:20
[구영식] 2006년 사이공 혹은 호치민
 글쓴이 : 주노
조회 : 1,994   추천 : 0   비추천 : 0  
□ 초빙칼럼   
                                                                                                    구영식.jpg
                                                                                                    구 영 식
                                                                                                     오마이뉴스 정치부장
 
2006년 10월 사이공 혹은 호치민
 
호치민 행 비행기에 올라타기 전 다섯 살 딸아이는 하얀 도화지에 하늘을 나는 비행기를 그렸다. 그림 속의 비행기는 별빛 속을 날고 있었다. 그렇게 4시간을 날으니 어느 새 도시의 불빛이 반짝 거렸다. 베트남의 경제수도 호치민시였다.
호치민시는 내게 ‘사이공’이라는 이름으로 익숙하다. 젊은 시절 구엔 반 봉의 <사이공의 흰옷>이나 작가 안정효와 박영한의 베트남 전쟁소설 <하얀 전쟁>과 <머나먼 쏭바강>을 애독했던 탓이다. 전쟁과 혁명, 그리고 사랑의 경계선에 서 있던 소설 속 인물들을 보며 마음이 아렸던 기억이 새롭다. 그런 기억이 우리 가족을 호치민시로 이끌었는지 모른다.
‘혼다 오토바이’의 천국
호치민시의 첫 인상은 오토바이였다. 오토바이는 호치민시 제1의 교통수단이었다. 아침과 저녁 출퇴근시간대에 보았던 도로 위 오토바이 행렬은 정말 장관(壯觀)이었다. 오토바이가 호치민시를 지배하고 있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호치민 시민들은 오토바이는 ‘혼다’, 핸드폰은 ‘노키아’, 전자제품은 ‘소니’, 자동차는 ‘도요타’를 선호한다고 한다. 특히 오토바이는 10대 중 9대가 혼다제품일 정도로 그 인기가 절대적으로 높다. 그래서 이곳에서 ‘혼다’는 오토바이의 대명사를 넘어 ‘일반명사’로 사용되고 있었다. 예를 들어‘ 오토바이를 고치러 갔다’는 것을 ‘혼다를 고치러 갔다’고 표현할 정도다. .
그런데 오토바이가 워낙 많아서인지 도심에서는 매연이 심했다. 그 매연의 영향 때문인지 마스크를 쓴 사람들이 제법 많았다. 그걸 보고 아내는 “여기서 마스크 장사 하면 잘 되겠다”라고 말하고는 웃었다. 몇 년 전 갔던 중국의 북경도 호치민시처럼 공기오염이 심했다. 개혁과 개방의 물결을 타고 있는 사회주의국가들의 공통점이었다.
원래 베트남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 중 하나가 ‘시클로’다. 하지만 시클로는 갈수록 쇠퇴해가고 있다. 베트남에 관광 온 외국인 여행자들만 타는 정도다. 내가 가져온 론리 플래닛의 <베트남 여행안내서>를 보니, 호치민시는 시내 51개 거리에서 시클로 운행을 금지시켰다고 한다. 늘어나는 교통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조치라는데 아쉬운 조치가 아닐 수 없다. 론리 플래닛의 여행안내서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만약 정부가 조용하고 운치 있는 시클로의 통행을 무제한 허가하고, 매연을 뿜어내는 자동차로 하여금 다른 길로 다니게 했더라면 이 도시는 한결 나아졌을 것이다.”
특히 이곳 집들이 베트남 제1의 도시치고는 앙증맞게 작은 것도 인상에 남았다. 사회주의 혁명정권이 들어선 이후 베트남의 모든 땅은 국유화되었다. 땅을 국유화한 뒤 인민들에게 분배하면서 조금씩 나눠줬기 때문에 집이 작을 수밖에 없단다. 하지만 집을 가진 사람이든 못가진 사람이든 대부분의 베트남 사람들은 아침을 식당에서 해결한고 한다. 워낙 업무시간이 이르기 때문인 것 같았다.
요즘에는 베트남에서도 아파트가 늘어가고 있다. 실제로 호치민시 외곽의 신도시에서는 대부분 아파트가 지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아파트 엘리베이터를 타려면 돈을 내야 한다. 한번 탈 때마다 500동(약 31원)을 관리인에게 줘야 한다. 사회주의 공화국도 이제 ‘돈 맛’을 알게 된 것은 아닐까? 하지만 이것과 정반대의 느낌을 주는 사실도 알게 됐다. 카페의 종업원들은 손님에게 받은 팁을 공동으로 관리한 후 공평하게 나눠 갖는다는 것이다. 함께 일하고 손님에게 서비스하기 때문이란다. ‘사회주의 공화국’다운 발상이랄까?
혁명가 호치민은 영원할까?
우리 가족이 짐을 푼 곳은 여행자들이 북적이는 팜 응우 라오(Pham Ngu Lao) 거리였다. 호텔이름이 ‘마이파이호텔’(Mai Phai Hotel)이었는데, ‘마이파이’는 ‘대나무’(竹)를 뜻한다. 원래 하루 숙박료가 25달러(약 2만 3000원)이었지만, 이곳 호텔 사장과 잘 아는 후배 덕분에 4달러나 할인할 수 있었다.
시장한 배를 채우기 위해 호텔 근처 쌀국수 집을 찾았다. ‘포24(Pho24)라는 간판을 달고 있는 식당이었다(‘포’는 쌀국수를 뜻한다). 알고 보니 대중적인 쌀국수 체인점이었다. 나는 처음에 간판이 ‘포24’이길래 24시간 운영하는 쌀국수집인 줄 알았다. 하지만 ‘포24'는 ‘24가지 재료로 만든 쌀국수’라는 뜻이란다.
난 닭고기 육수의 쌀국수를 시켰다. 그 맛은 입맛이 까다로운 나를 감동시킬 정도로 훌륭했다. 그래서 이곳에 머무는 동안 하루 두 끼를 그 쌀국수로 해결하기도 했다. 베트남을 여행한다면 어느 도시에서든 ‘포24’에서 한번쯤 쌀국수를 꼭 먹어보길 권한다.
베트남 사람들이 가장 즐겨 마시는 맥주는 ‘타이거맥주’다. 그런데 알고 보니 타이거맥주는 베트남 맥주가 아니었다. 싱가포르 맥주회사가 베트남에 들어와 생산하는 맥주라고 한다. 내가 호치민시에 도착한 첫날 처음 마셨던 맥주도 이 타이거맥주였다. 진짜 베트남 맥주로는 ‘333맥주’가 있는데, 숫자로 된 맥주 이름이 독특했다. 알고 보니 베트남 사람들은 숫자로 이름붙이는 것을 좋아한단다. 숫자 중에서도 ‘9’자를 제일 좋아하는데 ‘999편의점’이라고 간판을 내건 24시간 편의점도 있었다.
우리 가족은 호치민시에서 1주일이 넘도록 머물렀다. 하지만 내가 오래 전 소설에서 봤던 ‘사이공’은 이제 없었다. 호치민시도 개혁‧개방의 속도를 높이며 자본주의 길을 따라 걷고 있었다. 호치민에서 제일 크다는 ‘벤 탄 시장’(Cho Ben Thanh) 사거리는 히타치, 도시바, 후지제록스 등 일본기업 광고간판으로 도배돼 있었다. 삼성과 LG 등 한국 대기업 간판도 보였다.
그런데 이 사거리에는 '베트남의 호치민이여 영원하라!(VIET NAM HO CHI MINH MUOU NAM!)’는 문구도 걸려 있었다. 자본주의 물결 속에서도 '혁명가 호치민'은 베트남 사람들에게 ‘호 아저씨’로 살아있었다. 하지만 혁명가 호치민은 영원할 수 있을까? 그곳에 걸린 '베트남의 호치민이여 영원하라'는 문구는 역설적으로 그가 영원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지 모른다. 호치민과 히타치, 삼성 광고가 공존하는 그 사거리에서 어쩌면 철없을 이런 생각이 밀려들었다.
'혁명과 사회주의는 멀어지고, 자본주의는 가까워지고 있다.'
 
 
<프로필>
 
- 전남 강진 출생. 고려대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지난 1996년부터 월간 <사회평론 길>과 월간 <말>지 기자로 일했다. 2001년부터 현재까지 <오마이뉴스>에서 정당팀장, 기획취재팀장, 사 회팀장 등을 거쳐 현재 정치부장을 맡고 있다. '밀리언셀러 <마시멜로이야기> 대리번역 의 혹'과 '육사 출신 현역 대위의 MB 모욕죄 기소' 특종 보도, '2012년 대선후보 사실검증' 기 획기사로 각각 한국인터넷기자상(2007년)과 한국기자협회 이달의 기자상(2012년), 온라인저널 리즘 어워드(2013년)를 수상했다. 공저로 <한국의 보수와 대화하다>, <검사와 스폰서, 묻어 버린 진실>, <시민을 고소하는 나라>, <한 조각의 진실-30년 NHK 기자 천학범의 현대사 증언>, <표창원, 보수의 품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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