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영 우
국회의원
새누리당 수석대변인
도전은 나의 운명
저를 아끼는 많은 분들이 걱정했습니다. “김의원, 이번 전당대회에는 5선, 6선, 7선의원들이 출마하는데 김 의원이 당대표 될 수 있겠나? 최고위원도 안되고 헛돈만 쓸 텐데....” 그 분들 말씀이 맞았습니다. 결국 저는 최고위원도 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출마자 가운데 꼴찌를 했습니다. 게다가 선거비용도 들어갔습니다. 전당대회가 끝나는 날 마음이 한없이 허전하고 가족들과 많은 분들께는 죄송한 마음에 어디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과정은 돌이켜보면 미리 예견된 일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것은 이번에 도전하지 않았다면 나 스스로를 제대로 성찰해 볼 수 있는 값진 기회를 얻지 못했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도전은 이미 나의 핏속을 타고 흐르는 본능과도 같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시골중학교에 다니던 시절, 좀 더 넓은 세상이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누나와 함께 밥통과 이불보따리만 택시 트렁크에 싣고 서울로 떠났습니다. 처음엔 서울이 낯설고 두려웠지만 적응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좁은 자취방이었지만 학교친구들을 집으로 불러서 놀기도 하고 공부도 했습니다. 고등학교에 진학하자마자 늘 반장선거에 출마를 했습니다. 3년 동안 두 번 반장을 지냈습니다.
대학교에 다니던 시절에는 혼자 여행도 많이 했습니다. 5만원도 안 되는 돈을 가지고 열흘 넘게 여행을 한 적도 있습니다. 기차역에서도 자고 처음 본 등산객과 같은 텐트에서 잠을 자기도 했습니다.
기자생활을 할 때는 IMF금융위기를 맞이했습니다. 그 당시 해외, 특히 미국에서 유학하던 많은 학생들과 연구생들이 국내로 들어올 때 저는 거꾸로 쥐꼬리만 한 아파트를 팔아서 미국으로 혼자 유학을 떠났습니다. 당시 한국에는 아내와 세 살 바기 아들, 태어난 지 백 일된 딸이 있었습니다.
2008년 18대 총선에서 국회의원에 도전한 것도 큰 도전이었습니다. 그 당시 지역에서는 인지도가 2%에 미치지 못한 상황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이 밖에도 많은 도전을 한 것 같습니다. 때로는 성공도 하고 쓰라린 실패도 했습니다. 하지만 모든 도전에 공통된 것은 그 도전의 과정과 결과를 통해서 제 자신이 부쩍 성장한다는 사실입니다. 어쩌면 실패했을 때 더 많이 자란 것 같습니다. 도전을 하다보면 그 당시 나의 능력과 마음가짐이 테스트됩니다. 끊임없이 내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과정이 되는 것이죠. 매일 아침 우리는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을 봅니다. 하지만 매일매일 나 자신의 모든 것을 비춰보기는 쉽지 않습니다. 일기를 쓸 수도 있지만 그것은 결국 자신과의 속삭임입니다.
이번 전당대회라는 큰 거울에 비춰볼 때 아직도 미숙하고 여물지 않은 정치인 김영우를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왜 내가 처음에 국회의원이 되려고 했던가? 우리사회에서 끊임없이 신뢰를 잃어가는 정치를 어떻게 하면 복원시킬 수 있을 것인가? 어렵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어떤 희망을 줄 수 있을 것인가? 대한민국이 제2의 도약을 하기 위해서 어떤 점을 고쳐나가야 하는가? 이런 생각을 눈을 뜨는 새벽부터 밤늦게 까지 하게 된 것입니다. 이 얼마나 값진 일입니까? 이런 경험은 돈을 아무리 많이 주고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도전하지 않으면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봅니다. 도전하지 않고 일시적으로 운이 좋아서 성공처럼 보이는 결과가 주어지더라도 그 것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그런 결과는 땀을 통한 결과가 아니기 때문에 끝까지 유지할 수 있는 이유를 찾지 못하기 때문이죠.
사실 아직도 지난 전당대회 때 쓴 경비와 체력적인 소모는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나 스스로를 돌이켜봐야 할 시기가 돌아올 때마다 김영우의 도전은 계속될 것입니다.
<프로필>
- (現) 제18·19대 국회의원(포천시·연천군)
- (現) 새누리당 수석 대변인
- (前) YTN 기자
- 성균관대학교 국정관리대학원 국정관리학과 박사과정 수료
-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 학・석사 졸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