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3년 5.29. 천년 영화를 누린 콘스탄티노플 文明이 야만인 투르크 족(오스만 터키)의 침략에 멸망했다. 동로마가 멸망을 초래하기까진 외부의 적과 내부 적의 작당으로 나라를 망친 것은 어느 시대나 같았다. 동로마 제국 수도 콘스탄티노플이 멸망할 때는 무슨 일이 있었나?
나라의 종말이 가까우면 그 나라 국민. 지도자 할 것 없이 하나 같이 부패하고 무기력해져 국가안보가 군사력으로 지켜지는 걸 망각하고, 적에 경제원조로 매달리지만 결국은 적의 군비확장만 도와 더 빨리 침략당하는 결과를 낳는다. 동로마 멸망도 이런 수순을 밟으며 투르크 술탄 메메드 2世에 정복당했다.
AD324 콘스탄티누스황제는 내란서 정적들을 쳐부수고 권력 투쟁에 승리하나 그 모든 사연이 서린 로마를 떠나 동방에 새로운 제국 수도를 세우기로 했다.
유럽과 아시아를 연결하는 요충지 보스포루스 해협 연안. 그리스 옛 도시 비잔티움을 동로마 수도로 정했다.324年착공~330년 5.11일.6년 공사 끝에 완공했다.
건설한 수도는 자신 이름을 따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이라 했다. 세모꼴의 해양(海洋)도시. 군사적으론 천연요새다. 동쪽은 마르마라海로 북풍과 센 조류가 흘러 적함대 접근이 여의치 않고 서쪽은 황금각 만(灣)에 접해 한面만 육지로 이어졌다. 콘스탄티노플 성벽이 삼중으로 난공불락요새란 것은 지중해와 에게 해(海)에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Constantinople의 마지막황제는 콘스탄티누스11세 팔 라이온 러 구스다.】 성실하고 깨끗한 인품의 평화시대 황제론 흠잡을 곳 없는 인물이나 국가위급 시는 과단성이 없고 머리회전이 늦어 침략자야욕의 제물이 된 황제다.
재상 루 카스 노타 리스는 재물에 환장한 인간으로 공무는 뒷전이며, 돈벌이에 치중. 자유 무역항 콘스탄티노플서 제일가는 부자다. 그는 적국 투르크 술탄과도 라인을 가져 그쪽 부탁도 들어주며 나중 대비도 하는 이중행보 반역자다.
재상 노타 리스는 황제에게Constantinople을 포기하고“망명했다 재기하라” 꾀나 황재는 “그럴 바엔 는 죽는 게 낮다.”며 루 카스 노타 리스의 말을 듣지 않았다. 잘 키운 반역자 하나가 적엔 백만 大軍보다 낮단 말이 여기 해당된다.
나중 콘스탄티노플城이 함락되자 제일먼저 금은보화를 바쳐 들고 술탄 앞에 나가 잠시 동안이나마 환대를 받는다.
그러나 두 달後 게이인 술탄이 노타 리스 12살아들을 잠자리 상대로 궁전에 보내라 명령하자, 이를 거절할 수밖에 없어 술탄 병사가 두 아들과 노타 리스의 목을 베였다. 백성 원성을 산자를 살려두면 민심안정에 방해가 된단 판단과 기존 지배 세력단절을 위한 정책이다.
반역자는 일신 영화를 위해 조국을 배반하나 도움준 상대도 믿질 않아 결국은" 적과 내통했단"는 죄목에 처형당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반역자가 거만의 재산과 따르는 무리가 많으면 많을수록 그동안 들락거리면 퍼준 공로는 잊고 패거리와 함께 일괄 처형하는 게 정복者 민심안정 정책1호다.
노타 리스 총리시절, 헝가리 무기 제조기술자 우르반이 궁전에 찾아와 자기가 개발한 대포가 Constantinople성의 3중 성벽을 파괴할 수 있다고 신발명품을 사줄 걸 제안하나 재상 노타 리스 무기제조업자 우르반의 설명조차 듣지 않고 문전박대했다.
신무기개발로 적국 신경을 건드렸다간 전쟁발발로 이어진단 회색 중도주의 평화정책서 꼬랑지내리기다. 궁전서 홀대받고 쫓겨난 신무기발명자의 소문이 투르크 술탄 메매드2세 귀에 까지 들어갔다. 즉시사람을 보내 수도 아드리아노플 술탄궁전으로 불렀다.
설계도를 한 아름 안고 온 신무기 개발자 우르 반의 말에 귀 기울이던 술탄은 무기 기술자의 요구한 금액의 3배를 제의했다. 길이8m 포탄 무게600K의 30마리 소가 끄는 거대한 대포의 생산이 시작됐다. 우르반의 8개 대포가 Constantinople성벽 함락 일등공신이 된 건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
대포를 만들기 시작하면서 투르크(오스만터키) 술탄은 콘스탄티노플과 상호불가침조약을 체결한다. 술탄 메메드 2세는 21세 약관의 젊은이로 냉혹한 전략가였다.
전략이란 인간의 심리를 꿰뚫어 볼 수 있어야하는 병법이다. 터키 젊은 술탄은 인간심리에 정통했다. 어떤 편견도 사로잡히지 않고 조용하며 열정적인 성품이나 결단성에 한번 결심하면 대담한 방법으로 이루어내는 자질 소유자였다.
역사는 가정할 수 없으나 똑같은 조건에 콘스탄티노플황제와 뒤바뀌었다면 결코 오스만터키는 Constantinople성을 함락시킬 수 없었을 것이다.
【통치자 한사람 자질이 국가와 민족 운명을 바꾼다할 수 있을 정도로 중요하다.】 콘스탄티노플 인구는100만이 넘었으나 전쟁소문으로 상류층은 거의 國外로 빠져나가 주민 35.000 정도였고 병사는 용병포함 7.500명이었다.
1453년 4. 2. 술탄 메메드 2세는 서유럽 국가 중에 아무도 콘스탄티노플을 돕지 않는단 정보를 최종점검하고 친위대 에니젤리 군단 15.000포함. 총16만 군대를 이끌고 거포8대를 수백 마리 소에 끌려 동로마수도로 진격했다.
콘스탄티노플 황제는 연방사신을 보네 【조공을 올려 받치겠단 조건으로 평화회담을 구걸하나】 대답은 한결같이 【제위서 물러나 나라를 바친다면 백성은 살려준다.】란 대답이다.
상호 불가침이나 평화회담은 군대의 방위체제가 작동할 때만 지켜지는 것으로 사실상 휴지조각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Constantinople은 전쟁을 피할 수 없게 됐다. 성안국민에게 죽음을 각오하고 싸울 것이라 전쟁을 선포하나 심중으론 난공불락의 성벽을 믿었다.
1453. 4.12일 우르반이 만든 거포탄환이 성벽에 부딪쳐 파괴되는 성벽을 보자 성안 사람들은 흔들렸다. 투르크용병이 성벽을 향해 공격하고 정규병들은 용병 뒤에서 후퇴하는 병사 목을 사정없이 베었다.
콘스탄티노플 황제도 성벽을 기어오르는 적병을 칼로 후려치면 분전하나 성당과 왕궁창고에 쌓인 보화로 용병을 모집하는 작업은 하지 않고 어떻게나 서 유렵에서 자기 낮을 보고 구원병을 보낼 것이라 생각했다.
뒤에 성이 함락되고 적병들이 약탈한 금은보화가 성 소피아성당을 가득 채우고 식량창고 3개분까지 넘쳤다고 역사에는 기록됐다. 머리회전이 늦은 지도자는 군비가 충분해도 사용방법을 몰라 평화란 이름에 꼬랑지 내리기 바빠 제국을 멸망시킨 것이다.
최후의 날. 술탄은 큰소리로 외쳤다. “이제 도시는 우리 것이다” 밀리던 에니체리 군단 병사들은 하나가돼 사기충천했다. 격전 끝에 드디어 동로마 제국 깃발이 내려졌다. 가장 높은 탑에 투르크 국기가 올라갔다. 그 순간 메메드 2세는 일세를 풍미한 영웅이 되고 동로마 황제는 모든 게 끝난, 패장으로 적병 속에 뛰어들어 죽었다. 1453.년 5.29일 이다.
Constantinople성은 지옥의 아비규환이 따로 없었다. 시민들 모두, 제노아 인이나 베네치아 인이나 그리스 인이나 누구나 남녀노소 어린아이 할 것 없이 닥치는 대로 죽이고 약탈당했다. 성소피아 대성당의 성직자들과 수녀들은 노예로 끌려가고 얼굴이 반반하면 즉시 겁탈했다.
약속한 3일이 지나자 술탄은 Constantinople성을 오스만 투르크제국 수도로 정하고 이름은 이스탄불이라 했다.5 세기 뒤 1930년 터키수도 이스탄불로 국제사회의 공식인정을 받았다.
세계사에 나타난 수많은 전쟁서 배워야 할 중요한 점은 전쟁의 승리는 병사의 숫자가 많아서도 아니요. 무기가 우수하다고 꼭 이기는 게 아니라, 전쟁은 군대 사기가 결정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지휘자 자질이 절대로 필요하다.
전쟁의 승리는 병사 수나 무기가 아니라 지도자 자질과 전략으로 승부가 결정 된단 걸 고대역사가 보여주고 있다. (이 스토리는 로마이야기서 인용한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