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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3-11-16 14:41
* 본래의 우리역사
 글쓴이 : 신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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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달국의 위대한 성인 제왕들
백두산의 신시에서 출발한 배달국은 점차 도시국가의 틀을 벗고 동북아의 대국으로 성장하였다. 그 과정에는 특히 세 분 태호 복희씨, 염제 신농씨, 그리고 치우천황의 지대한 공덕이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5천5백 년 전, 5세 태우의환웅(BCE 3511~ BCE 3419)의 막내아들인 태호 복희씨(BCE 3528~ BCE 3413)는 하도河圖를 그려 음양오행 사상의 기틀을 마련하고, 팔괘를 지어『 주역』의 기초를 닦았다.

복희씨 덕분에 인간이 우주의 변화 법칙을 체계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또한 결혼 제도를 만들고, 침針과 금슬琴瑟을 만들어 인간 삶의 편리를 도모하였다. 복희씨는 한마디로 동양철학의 아버지요 인류 문명의 창시자이다.

약 5천2백 년 전, 8세 안부련환웅(BCE 3239~ BCE 3167) 때 인물인 염제 신농씨(BCE 3218~ BCE 3078)는 농사법과 불을 쓰는 방법을 개발하였다. 배달 초기에 불을 발명한 고시씨의 후손인 신농씨는 자신이 베푼 화덕火德으로 임금에 추대되어 신농국이라는 나라까지 세웠다. 또한 수백 가지 풀을 직접 맛보아 의약을 개발하였으며, 시장을 열어 교역을 촉진시켰다. 복희씨가 기초를 마련한 문명이 신농 때에 이르러 더욱 발전하게 된 것이다.
14세 자오지천황(치우천황(BCE 2706~ BCE 2598)은 약 4천7백 년 전 요서를 넘어 산동성과 그 주변은 물론 서쪽으로 탁록까지 진출하여 광활한 영토를 개척한 성웅聖雄이다. 치우천황의 재위 초기, 신농국이 8대 유망楡罔(BCE 2758~ BCE 2688)에 이르러 쇠퇴의 길을 걷자, 서방으로 출정하여 지금의 산동성, 강소성, 안휘성을 배달의 영토로 흡수하였다. 그런데 그 틈을 타 서토 지역의 일개 제후였던 헌원(BCE 2692~ BCE 2592)이 치우천황을 밀어내고 동북아의 천자가 되려고 일어났다.

이에 치우천황은 탁록 벌판에서 헌원의 군대와 맞서 10년 동안 73회의 접전을 치루어 마침내 헌원을 굴복시켰다. 나아가 넓어진 강역을 다스리기 위해 도읍을 백두산 신시에서 서토에 가까운 청구靑邱(현 대릉하 유역)로 옮겨 배달의 새 시대를 열었다.

이름만 들어도 간담이 서늘해질 정도로 법력과 위용을 떨친 치우는 배달국 이후 수천 년 동안 백성들에게 숭배와 추앙의 대상이었다. 진한 시대 중국인들은 해마다 10월이면 치우천황에게 제사를 지냈는데, 그때마다‘ 붉은 기운[蚩尤旗]’이 천황의 능에서 하늘로 뻗쳤다고 한다. 이에 대한 기록은『 태백일사』,『 규원사화』 등 국내 사서만이 아니라,『 사기』「 천관서」,『사기집해』 등 중국 기록에도 나타난다.

백성들만이 아니라 중국 황제들도 치우천황을 숭상하였다. 초한전으로 유명한 한 고조 유방은 치우천황 전각을 지어 제사를 지내고 싸움에 나가, 진秦의 수도 함양을 평정하였다. 4년 후 진나라 땅을 완전히 평정하였을 때, 유방은 장안長安에 치우의 사당까지 지어 치우천황을 돈독히 공경하였다『( 태백일사』).

요컨대 태호 복희씨, 염제 신농씨, 치우천황, 이 세 분은 동방 문명의 중심축을 세운 위대한 제왕들이다. 이 세 분 제왕이 출현한 배달시대는, 삼신의 세 가지 신성 가운데 문명을 꽃피우는‘ 교화신敎化神’의 신성이 발현된 시대였다. 그리하여 역학, 천문, 의술, 농경술과 같이 인간의 삶을 편리하게 하고 인간을 교화시키는 다양한 분야가 배달 시대에 크게 발전하였다.

단군왕검이 건국한 고조선
초대 거발환 환웅(BCE 3897~ BCE 3804)이 배달국을 개국한 지 1,500여 년, 18세 거불단 환웅(BCE 2381~ BCE 2333)에 이르러 배달국은 그 역사의 막을 내리게 된다. 거불단 환웅이 세상을 떠나고, 14세에 비왕裨王으로 임명되어 24년간 제왕 수업을 받은 단군왕검(BCE 2333~ BCE 2241)이 천제의 아들로 추대되어 제위에 올랐다. 단군왕검은 배달국 말기의 혼란을 잠재우고 9환족 전체를 하나로 통일하여 새로이 조선朝鮮이라는 나라를 열었다(BCE 2333).

단군왕검은 삼신상제님께 천제를 올리고, 아사달(지금의 흑룡강성 하얼빈)에 도읍을 정하였다.‘ 아침 태양이 떠올라 빛을 비추는 땅’을 뜻하는 아사달은 송화강 유역에 위치하여 송화강 아사달이라 불린다.



그 후 22세 색불루 단군(BCE 1285~ BCE 1238)은 남서쪽에 있는 백악산 아사달(지금의 길림성 장춘)로 천도하였고, 다시 44세 구물단군(BCE 425~ BCE 397)은 남쪽으로 더 내려와 장당경 아사달(지금의 요령성 개원시)로 천도하였다. 그리하여 총 마흔일곱 분 단군이 2,096년 동안 고조선을 다스렸다.


나라를 삼한三韓으로 나누어 다스림
고조선은 신교의 삼신 가운데 만물의 질서를 바로잡는 치화신治化神의 도가 실현된 때이다. 그래서 단군왕검은 삼신三神의 원리에 따라 나라를 삼한三韓, 즉 진한·번한·마한으로 나누어 다스렸다. 이것이 바로 고조선의 국가 경영 제도인 삼한관경제三韓管境制이다.

단군왕검은 대단군으로서 요동과 만주 지역에 걸쳐 있던 진한을 통치하고, 요서지역의 번한과 한반도의 마한은 각각 부단군이 통치하였다. 마한은 하늘의 정신[天一]을, 번한은 땅의 정신[地一]을, 진한은 천지의 주인이요 중심인 인간[太一]을 상징하였다.

삼한으로 나누었으니 도읍지도 세 곳이다. 진한의 수도는 송화강(하얼빈) 아사달, 번한의 수도는 안덕향(지금의 하북성 당산시), 마한의 수도는 백아강(지금의 평양)이었다.

일찍이 한말의 애국지사요 민족 사학자인 단재 신채호 선생은 삼한관경三韓管境이 고조선의 국가 경영 원리였음을 밝혀내었다. 선생은 한반도의 남쪽 삼한시대 이전에 만주, 요서, 한반도에 걸쳐 광대하게 뻗어 있었던 단군조선의 삼한시대가 실재했음을 맨몸으로 북만주를 누비며 입증하였다.

고조선의 정치에서 가장 큰 특징인 삼한관경제는『삼성기』,『단군세기』,『태백일사』에서 일관되게 전하는 것으로, 고조선 역사와 문화의 핵심을 헤아리는 결정적이고 중대한 열쇠이다. 관경제에 대한 이해 없이는 고조선의 영토 범위, 여러 도읍지, 복잡한 대외관계 등을 분명하게 설명할 수 없다. 현 사학계가 고조선사를 제대로 밝히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신교 삼신문화에 근거한 삼한관경제에 대한 인식 부족에 있다.



고조선의 강역
고조선은 그 영토가 동쪽으로는 한반도의 동해에 미치고, 북쪽으로는 흑룡강을 지나 시베리아까지, 남쪽으로는 큐슈와 일본 본토까지, 서쪽으로는 몽골에 이르는 대제국이었다. 이러한 고조선을 고려, 조선의 사대주의자들과 일제 식민사학자들이 한반도 북부에 국한된 소국으로 줄여 놓았다. 그러나 지명 몇 개만 고증해 보아도 그 진실은 쉽게 드러난다.

단군왕검께서 재위 67년에 태자 부루를 보내어 9년 대홍수를 겪고 있던 중국에 ‘오행의 원리로 물을 다스리는 법’을 전하여 요순堯舜 정권을 구해 주었다. 그때 중국과의 국경을 살펴, 유주幽州와 영주營州를 고조선 땅으로 편입하였다. 두 곳은 오늘날의 하북성과 산동성 일대이다.『 위서』「 지형지」에 따르면 영주는 당시 중국에서 가장 동쪽에 있었다. 중국의 동쪽 끝이면 바로 고조선의 서쪽 끝이다. 고조선은 건국 초기에 이미 중국 대륙까지 뻗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13세 흘달 단군(BCE 1781~ BCE 1722)은 하나라의 마지막 왕 걸桀을 정벌할 때 빈邠과 기岐를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빈과 기는 현재의 섬서성에 위치하는데 주나라가 일어난 곳으로 유명하다. 이때 고조선 군사와 낙랑 군사가 합세하였다고 한다. 이 낙랑은 과연 무엇인가? 지금의 하북성, 요령성 일대에 해당하는 낙랑樂浪은 배달국의 태호 복희씨(BCE 3528~ BCE 3413) 때부터 있었던 지명으로, 고조선 시대에는 고조선의 제후국 이름이었다. 낙랑은 23세 아홀단군(BCE 1237~ BCE 1162)때 낙랑홀樂浪忽이라는 성城으로 다시 나타난다.

BCE 300년경 연나라가 번조선을 침입하였을 때, 만번한滿番汗을 새로운 국경으로 정하였다. 『 사기』,『위략』,『삼국지』「위서동이전」 등 중국 사서도 이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중국 사가들은“ 고조선의 서쪽 땅 2천여 리를 빼앗았다”는 구절을 더하였다.

만번한은 만현滿縣과 번한현番汗縣을 합친 말로서, 만현은 지금의 요령성 개주시 지역이고, 번한현은 그 인근의 해성시 지역이다. 연나라에게 2천 리를 빼앗겨 줄어든 강역의 새 국경이 요동반도였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고조선의 원 국경은 어디였는가? 고조선의 위치를 처음 언급한『 산해경山海經』과『 사기史記』,『전국책戰國策』,『설원說苑』,『수경주水經注』 등의 기록으로 볼 때, 지금의 영정하永定河 이남이 고조선의 국경이었다.

20세기 후반 요서 지역에서 중요한 고고학 발굴이 많이 이루어졌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하가점문화이다. 하가점夏家店은 내몽골 자치구 적봉시의 한 촌락으로, 건조한 기후 때문에 유적과 유물이 빗물에 유실되지 않고 시대별로 층층이 잘 보존된 곳이다.

그 상층에서 유목민 문화가 나타났고, 하층에서 BCE 2400∼ BCE 1500년에 걸친 농경집단의 청동기 문화가 나타났다.

하층에서 출토된 비파형 청동검은 청동기 문화의 대표적 유물로서 만주와 한반도에서 발굴된 청동검과 동일한 것이다. 하가점 하층문화는 고조선 문화이고, 하가점은 고조선의 영역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문헌 기록으로 보나 유물로 보나, 고조선은 한반도에서 요서에 이르는 드넓은 땅을 차지한 동북아시아의 대국이었다. 송호정 등 일부 학자들은 당시에 이런 제국이 존재할 수 없다고 단정하지만 역사적으로 기마민족 국가는 농경민족 국가보다 훨씬 광대한 영토를 가졌음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말의 질주 속도는 시속 60킬로미터가 넘으며, 실제로 13세기 몽골 기마군단은 유럽에서 하루에 100킬로미터 이상 진군하였다. 고조선은 기마민족적 요소를 가진 나라였기 때문에 동북아의 광대한 강역을 충분히 다스릴 수 있었다.


고조선의 대외관계
고조선과 당시 중국 왕조들의 관계는 어떠하였을까?『 단군세기』는 고조선이 초대 단군 때부터 중국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고조선의 강역을 논하면서 잠시 소개하였듯이, 순임금 때 중국은 국가의 존망이 달린 대홍수를 당하였다. 그 전에 고조선의 도움으로 보위에 오른 순은 9년 동안 계속된 물난리도 고조선의 도움으로 해결하였다. 그 결과, 순은 정치적으로 더욱 고조선에 예속되었다.

고조선은 회수와 태산 지역의 제후들을 평정하고 그곳에 설치한 분조分朝를 순으로 하여금 감독하게 하였고, 현 산동성 교남시의 낭야성에 감우소監虞所(우순의 정치를 감독하는 곳)를 설치하여 순으로부터 분조에 관한 일을 보고받았다. 이로 볼 때,『 서경』에 기록된“ 사근동후肆覲東后”라는 구절은‘ 순임금이 동방의 천자를 알현하였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우禹가 세운 하나라(BCE 2205~BCE 1766)도 고조선에 예속되었다. 우는 아버지 곤이 치수에 실패하여 순임금에게 처형당한 후 그 뒤를 이어 치수사업을 맡아보던 관리(司空)였다. 순을 대신하여 참석한 도산회의에서 우는 고조선의 태자 부루에게서 오행치수법이 적힌 금간옥첩(金簡玉牒)을 받았다. 이 비법으로 홍수를 해결하고 인심을 얻어 나중에 순의 왕위를 물려받아 하나라를 열었다. 하나라는 마지막 군주 걸桀에 이르기까지 내내 고조선을 상국으로 모셨다.

하나라에서 상나라로 중원의 왕조가 교체되는 데도 고조선의 힘이 작용하였다. 상나라의 초대 임금인 탕(BCE 1766~ BCE 1122)이 하나라 임금 폭군 걸桀을 정벌하고자 하였을 때, 13세 흘달 단군(BCE 1781~ BCE 1722)이 처음에는 걸을 지원하였으나 걸의 포악한 정치가 개선되지 않자 결국 탕湯의 손을 들어 주었다.
상나라는 동북방을 존숭하였다. 그래서 상나라 말기의 도읍지였던 하남성 안양시 은허 유적의 궁전, 성벽, 무덤 등은 모두 동북방을 향하고 있다. 왜냐하면 상나라의 동북방에는 고조선이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초기의 상나라는 고조선을 문화의 조국으로 받들었으나, 12대 하단갑 때부터는 조공을 바치지 않았고, 22세 무정에 이르러서는 급기야 고조선의 변방을 침범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21세 소태단군((BCE 1337~ BCE 1286)과 22세 색불루단군(BCE 1285~ BCE 1238)이 상나라를 쳐서 대파하였다. 패전을 거듭하던 상나라는 결국 멸망하였다.

상나라 다음으로 550년 동안 중원을 지배한 주나라(BCE 1122~ BCE 256)는 일반적으로 한족漢族이 일으킨 나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창건자인 문왕과 무왕은 그들의 시조 설화에서 알 수 있듯이 동이족 출신이다.

상나라 군대를 상대하기에 역부족이던 주나라가 창업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동이족의 지원을 받은 덕분이다. 주나라 건국을 도운 동이족, 그 대표적 인물이 바로 강태공이다.

무왕이 나중에 강태공을 산동반도 지역에 있는 제나라에 봉한 것도, 동이족 출신인 그를 주나라 왕실에 비협조적인 그 지역 동이족을 다스릴 적임자로 보았기 때문이다. 문왕과 무왕 이후 주나라는 앞선 왕조와 마찬가지로 고조선에 조공과 방물을 바쳐 예를 표시하였다.

요컨대 고조선은 동북아의 천자국天子國이었으며, 하·상·주 중국 3왕조는 모두 고조선에게 정치적 지배를 받았다. (원문: 상생출판 환단고기)

고조선과 흉노족, 선비족, 돌궐족, 몽골족 등 여러 북방 민족과의 관계


☆ 고조선과 흉노족
『단군세기』에는 고조선과 북방 민족 간의 관계를 알려 주는 귀중한 기록들이 있다. 3세 가륵단군 6년(BCE 2177) 조에 나오는“ 임금께서 열양 욕살 삭정索靖을 약수弱水 지방에 유배시켜 종신토록 감옥에 가둬 놓았다. 후에 용서하여 그 땅에 봉하시니 흉노의 시조가 되었다”라는 기록과 4세 오사구단군이 재위 원년인 BCE 2137년에 자신의 아우 오사달을‘ 몽고리한’에 봉했다는 기록, 또 30세 내휴단군 5년(BCE 905)에 흉노가 공물을 바쳤다는 기록, 32세 추밀단군 3년(BCE 847)에 선비산鮮卑山의 추장 문고가 공물을 바쳤다는 기록 등이 그것이다.

몽골 고원에서 중앙아시아를 거쳐 남러시아와 동유럽 일대에는 광대한 초원 지대가 이어진다. 이들 지역은 유목생활을 영위하는 몽골계와 투르크계에 속하는 다양한 유목민들의 공간이었다. 동양사에서는 중국 북방의 여러 유목민과 중국 간의 갈등이 아주 드라마틱하게 전개되었다. 중국인들은 이러한 북방민족을 융戎, 적狄, 호胡 등의 다양한 이름으로 부르면서, 물리치고 억압해야 할 무지하고 흉악한 오랑캐로 여겼다.

그러나 북방민족을 오랑캐로 여긴 것은 어디까지나 중화사상에 빠진 중국인들의 편견 때문이다. 북방 유목민들은 분명 정착 농경민과는 다른 생활방식을 채택한 사람들이지만 결코 야만인은 아니었던 것이 실제로 기마술과 야금술 및 금속가공 기술은 중국인들보다 앞서 있었다.

『단군세기』의 기록에 의하면 흉노의 시조는 한민족이다. 흉노는 그 수가 계속 늘어나 진나라 때 와서는 이미 오르도스와 몽골고원, 천산산맥 일대를 주름잡고 있었다. 흉노는 그 우두머리를 선우單于라 하였다.

흉노는 한나라 초기 묵특선우冒頓單于(BCE 209~BCE 174) 때 서쪽의 월지와 동쪽의 동호東胡를 격파하고 아시아 최초로 대유목 제국을 세웠다. 묵특선우는 흉노 제국을 신교의 삼신문화의 고향인 고조선처럼 셋으로 나눠 통치하는 제도를 도입하였다. 자신은 중앙을 통치하고 동쪽은 좌현왕이, 서쪽은 우현왕이 통치하게 하였다. 좌현왕은 우현왕보다 우선시 되었는데 보통 선우의 아들을 좌현왕으로 삼았다.

선우는 자신을‘ 탱리고도撑梨孤塗선우’라 하였는데, 탱리撑梨는‘ 하늘’을 뜻하는 흉노어‘ 텡그리Tengri’의 음역이고,‘ 고도’는 아들을 의미한다. 따라서 탱리고도는 하늘의 아들, 즉 천자天子를 의미한다. 흉노는 천지와 일월을 숭배하고, 나아가 조상을 숭배하였고, 일 년에 세 번 큰 제사를 지냈다.

특히 정월의 춘제春祭와 오월의 용성대제龍城大祭는 대규모 천제였다. 중국 측의 기록에 의하면 흉노는 하늘에 제사지낼 때 이용하는 큰 금상이 있었다고 한다. 흉노의 한 왕인 휴도왕의 땅에 있던‘ 제천금인祭天金人’이 그것이다. 선우는 매일 해와 달에게 절하고 자신이 거처하는 게르(천막집)의 문도 항상 동쪽을 향해 배치하였다. 이처럼 문을 동향으로 한 것은 동쪽을 중시하는 동이족의 관습과 일치하는 것이다.

중국 역사서에서 흉노는 BCE 4세기 전국시대에 처음 등장한다. 중국인들의 입장에서 볼 때 흉노는 틈만 있으면 연, 조, 진 나라를 침략하는 골칫거리였다. 이 세나라는 모두 흉노의 침략을 막기 위해 장성을 쌓았다. 이것을 연결한 것이 진시황 때 이루어진 만리장성이다.
진시황은 장군 몽염에게 삼십만 군을 주어 흉노에게 반격을 가하고 서쪽의 농서군에서 동쪽의 요동군 갈석에 이르는 장성을 구축하였다. 그러나 만리장성 축조는 백성들에게 큰 부담을 주었고 결국 2세 황제인 호해 때 진나라는 진승과 오광의 반란으로 망했다. 흉노의 위협이 중국 최초의 통일국가를 멸망시킨 원인의 하나였던 것이다.

진에 이어, 유방이 세운 한나라도 흉노의 공격에 시달렸을 뿐, 흉노를 제압하는데 실패하였다. 한고조 유방의 경우 흉노와의 전쟁에서 포위당했다가 가까스로 뇌물을 주고 빠져나오기도 하였다. 이후 공주와 공납을 보내 굴욕적으로 평화를 유지하였다. 한 무제 때 와서는 다시 흉노와 전쟁을 시작하였는데 이 전쟁은 근 50년 동안 계속되었다.
그러나 한 무제는 흉노를 굴복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큰 손해를 보았다. 장진퀘이에 의하면 흉노와의 전쟁은 백성들의 생활을 곤궁하게 만들고 국력을 약화시켰던 것이다. 그래서 무제는 다시는 변방으로 출정하지 않겠다는 뜻을 담은‘ 윤대輪臺의 조서’를 발표하고 자신의 실책을 반성하였다.

한 무제가 위만조선을 공격하고 그곳에 군현을 설치하려 한 것도 흉노를 견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위만조선이 흉노와 손을 잡는 것을 두려워했던 것이다. 그런데 한 무제 때 한국사와 연관하여 중요한 일이 일어났다. 흉노의 비왕 가운데 한 사람인 휴도왕의 아들이 자기 어머니와 함께 한나라의 포로가 된 것이다.

흉노 왕자는 왕의 말을 돌보는 일을 맡았는데, 후에 품위 있는 거동과 성실함이 한 무제의 눈에 띄어 무제의 측근이 되었다. 무제는 이 흉노 왕자 김일제金日磾를 뒤에 ‘투후’로 봉하였다. 투후는 오르도스의 제후라는 뜻이다. 그 후손 중에는 왕후(원제의 비 효원왕후)도 있다. 일설에 의하면 왕망王莽도 김일제의 고손이다.

외척인 김일제 가문은 왕망이 정권을 잡으면서 최고의 권세를 누렸다. 그러나 왕망이 몰락하자 위험한 처지에 몰렸다. 정확한 경로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이들은 한반도로 망명한 것으로 보인다. 문무왕 비문과 중국 시안[西安]에서 발견된 당나라 시대의 묘비명에서 김일제가 신라 김씨 왕가의 조상임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중국 사서 기록에 의하면 한 무제가 김일제에게 김씨 성을 하사하였다고 한다『( 한서』「 김일제전」).

1세기 초 한나라에서 망명한 김일제 후손이 신라와 가야에 들어와서 왕권을 잡았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가야가 있었던 지역에서 기마민족의 유적이 대거 발견되었다. 유물들 가운데 청동제 솥인 동복銅鍑은 흉노를 비롯한 중앙아시아 유목민들이 제사의식을 위해 말에 싣고 다니던 물건으로, 유럽의 훈족 루트에서도 많이 발견되었다.

흉노 제국은 BCE 1세기 중반에 내분이 일어나 둘로 분열되었다. 호한야선우가 이끄는 동흉노는 한나라와 동맹을 맺고 중국 북쪽에 머물렀지만 한나라와의 타협하기를 거부한 질지선우가 이끄는 서흉노는 중앙아시아 쪽으로 이주하였다. 동흉노는 한 세기 뒤에는 다시 남북 흉노로 분열되었다.

남흉노는 고비사막에서 남쪽으로 내려와 한나라의 번병藩兵(수비병)이 되었다. 몽골 초원은 북흉노가 지배하였다. 그러나 북흉노는 한 제국과 남흉노 연합세력의 공격 때문에 91년에는 몽골리아를 포기하고 중앙아시아의 일리강 유역으로 이주하였다. 이러한 이주에는 가뭄과 병충해 같은 자연환경의 악화에도 기인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 후한서』「 남흉노전」에는“ 흉노국은 매년 가뭄과 해충의 습격으로 헐벗은 땅이 수천 리에 달하고 초목은 전부 말라버려 기아와 질병으로 사망한 사람과 가축의 수가 삼분의 이에 이르렀다”라는 기록이 있다.

북흉노는 일리강 인근 오아시스 국가들을 지배하기도 했지만 결국 몽골리아 초원의 새로운 패자인 선비족의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2세기 중반 즈음에 더 서쪽으로 옮겨 오늘날의 카자흐스탄 초원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 후 이들은 역사적인 기록에서 사라져 버린 듯했지만, 4세기 중반에 갑자기‘ 훈hun’이라는 이름으로 역사의 무대에 모습을 드러냈다.

훈족은 370년경 흑해 북부에 나타남으로써 처음으로 유럽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이들은 볼가강을 건너 남러시아 초원지대에 거주하던 알란족을 공격했고, 이어서 알란족과 함께 동고트족과 서고트족을 공격하여 유럽 대륙에 민족이동의 대물결을 야기하였다.

공포에 질려 도주한 게르만족이 밀물처럼 로마 국경 안으로 몰려들자 이를 제어하지 못한 서로마 제국은 결국 무너지고 말았다. 그래서 게르만족의 이동은 서양 역사에서 고대의 종말을 초래한 사건으로 평가된다. 바로 이 게르만족의 이동은 훈족의 공격 때문에 촉발된 것이었다.

훈족은 이 시기 이후 거의 한 세기 동안 동서 유럽 여러 지역을 침략하여 유럽인에게 커다란 공포심을 불러일으켰다. 훈족은 아틸라 대왕(395~453) 때에 이르러 유럽 일대를 지배하는 거대한 세력으로 등장하였다. 이를 훈제국이라 부르는데 우랄산맥에서 동유럽 일대에 걸친 광대한 영역을 지배하였다.


☆선비족
북흉노가 1세기 말 멀리 중앙아시아 초원으로 떠나 버리자 흉노의 본거지이던 몽골 고원은 일시적으로 공백지대가 되었다. 그리하여 흉노의 지배를 받아오던 여러 유목집단들이 초원을 지배하기 위한 각축이 시작되었다. 각축에서 선비족이 승리하여 북방지역을 통일하였다.

2세기 중반에는 단석괴檀石槐라는 영웅이 나타나 선비의 여러 부족을 하나의 국가로 통합하였다. 이 선비제국은 북으로 바이칼호, 서로 신장의 일리강, 동으로 만주 일대에 걸치는 넓은 땅을 차지하였다. 그러나 선비제국도 다른 유목민들이 세운 다른 제국처럼 여러 부족집단들의 연합체였다.

단석괴가 사망하자 선비제국은 순식간에 여러 집단로 분할되었다. 그런데 중국에서 한나라가 망하고 그 뒤를 이어 동탁, 원소, 조조, 유비 등 군웅이 패권을 놓고 다투는 삼국시대와 그 뒤를 이은 위진魏晉 제국이 붕괴하면서 중원이 혼란에 빠지자 선비족은 그 틈을 이용하여 대거 북중국으로 밀고 들어갔다. 탁발拓跋, 모용慕容, 우문宇文, 단段, 걸복乞伏 등의 선비족의 여러 부가 이때 거의 모두 남하하였다고 한다.

중국사에서 말하는 소위 5호16국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탁발부는 대국代國을 세웠고, 모용부는 전연前燕·후연後燕·서연西燕·남연南燕 등의 나라를 세웠다. 또 산서 지역의 흉노는 한漢·전조前趙·후조 등을 세웠다. 이 가운데서 탁발부의 대국은 다른 국가들을 모두 정복하고 북중국을 통일하였다. 이 나라가 북위北魏이다. 북위는 후에 동위東魏와 서위西魏로 분열되었는데 다시 북제北齊와 북주北周로 이름이 바뀌었다.

수나라는 바로 북주의 귀족인 수국공隋國公 양견이 나라 이름을 수로 바꾼 것에 불과하다. 수는 다시 당으로 이어지는데 수·당의 기원은 바로 선비족인 탁발씨였던 것이다.

5호16국 시대에 북방 유목민족들이 중국 본토로만 진출한 것은 아니다. 한반도로도 적지 않은 수가 왔던 것으로 보인다. 서울대 김호동 교수는 북방 유목민의 일부가 신라에 정착하였다고 한다.

4~5세기경에 조성된 신라의 대형 적석목관분 무덤에서 중앙아시아의 문화적 기류를 느끼게 하는 유물이 대거 발견되는 것은 이처럼 선비족이 들어왔음을 증명한다. 훈족의 출현으로 유라시아 대륙의 서부에서 민족대이동이 일어난 것과 거의 같은 시기에 대륙의 동부에서도 그에 못지않게 커다란 민족이동이 발생하였던 것이다.

북방 유목민들의 이동의 파고는 유럽에서는 서로마 제국의 멸망을 가져오고 중국에서는 북방민족이 중원을 장악한 5호16국 시대를 열었으며 한반도와 일본에서는 기마민족의 정권을 성립시켰다. 한마디로 말해 유목민은 유라시아 대륙의 역사를 유목민의 대이동으로 크게 바꾸어 놓았던 것이다.


☆돌궐족
『단군세기』에는 흉노의 시조에 대한 언급뿐 아니라 투르크계인‘ 강거康居’에 대한 기록도 나온다. 강거는 흉노의 서쪽에 자리 잡은 유목민으로서『 사기』에도 나온다. 3세 가륵단군(BCE 2182~ BCE 2138) 8년에 강거가 반란을 일으키자 단군이 지백특에서 토벌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지백특은 티베트를 가리킨다. 18세 동엄단군(BCE 1484~ BCE 1436)때에는 지백특 사람이 공물을 바치러 왔다는 기록도 있다. 이 기록은 고조선의 활동영역이 티베트 인근까지 뻗쳤음을 시사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단군세기』에 직접 나오지 않지만 투르크 계통의 민족으로서 동양 고대사와 서양 중세사에 큰 영향을 미친 민족이 있다. 바로 투르크족이다. 투르크족은 6세기 중반에 서쪽으로 카스피해에서, 동쪽으로 몽골과 만주에 이르는 광대한 유라시아 초원을 제패한 강력한 유목제국을 세웠다.

이 제국을 건설한 사람들은 스스로 족속 이름을‘ 투르크(Turk)’라 하였는데, 중국 측 자료에는‘ 돌궐突厥’이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다. 오늘날 터키Turkey라는 나라 이름도 바로 이 투르크에서 비롯한 것이다.

돌궐 제국은 기원 후 1세기 중반에 흉노가 붕괴된 뒤 실로 500년 만에 초원의 유목민을 통합하고 출현한 국가였다. 중국 측 기록에 의하면 돌궐 제국은 553년에 토문土門이라는 이름의 수령이 몽골리아에 있던 몽골족 국가 유연柔然을 멸망시키고 세운 나라이다. 돌궐은 몽골계인 유연의 예속 하에 있던 집단으로 알타이 지역에서 야금 일에 종사하였던 것이다. 돌궐족은 알타이 산지에서 나는 철광석을 제련하는 등 금속가공에 뛰어난 솜씨를 보인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돌궐 제국의 건설자인 토문이 죽자 그 영토는 아들 무한과 아우 이스테미에게로 나뉘어졌다. 카간의 칭호를 쓴 아들은 몽골 지역을 차지하여 동돌궐이 되었고,‘ 야브구’라는 칭호를 사용한 이스테미의 나라는 서돌궐이 되었다. 서돌궐은 중앙아시아 일대에 위치하였다.

서돌궐은 곧 사산조 페르시아와 협력하여 헤프탈Hephtal을 쳐서 멸망시켰다. 이어서 동돌궐은 동쪽으로 거란족을 복속시키고, 북으로 바이칼호에 이르렀다. 남으로는 고비사막을 넘어 당시 북주·북제로 나뉘어 있던 북중국을 군사적으로 압박하였다. 당시 북주와 북제는 서로 대립하였기 때문에 북방의 돌궐에게 환심을 사기 위해 경쟁적으로 재물을 갖다 바쳤다.
그러나 중국에 당나라가 들어서자 상황은 급속히 바뀌기 시작하였다. 돌궐의 내분이 격화되고 자연재해가 겹쳤기 때문이다. 결국 당나라는 쇠약해진 돌궐, 초원의 대제국을 일거에 무너뜨려 버렸다.
그러나 돌궐은 중국의 지배를 받은 지 반세기 만에 놀랍게도 제국을 부흥시켰다. 만리장성 주변 내몽골 지방에 살면서 당나라의 감시와 통제를 받던 부족민 사이에서 670년대 후반부터 독립을 향한 움직임이 나타나 돌궐 제국을 재건한 것이다. 이것이 제2 돌궐제국이다.

다시 일어난 돌궐 제국은 752년에 그 지배하에 있던 세 부족의 반란으로 무너졌다. 세 부족 가운데 하나인 위구르가 몽골의 모든 유목민을 제압하고 돌궐의 뒤를이어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위구르족은 9세기 중반에 몽골고원에서 천재가 빈발한 때에 유목민들 사이에 내분이 일어나 망하게 되었다.
돌궐의 후예들은 차츰 서진하여 이란 지역에 왕조(가즈나 왕조)를 세우기도 하고 이슬람을 받아들여 이슬람의 노예와 용병 노릇을 하였다. 그러다가 동로마 제국으로 침투하여 셀주크 제국과 오스만 제국을 건설하였다.


☆몽골족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단군세기』 4세 오사구단군(BCE 2137~ BCE 2100)조에는 단군이 아우 오사달을 ‘몽고리한蒙古里汗’에 봉하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BCE 2137년의 일이다.

그런데 사마천의『 사기』에는‘ 동호東胡’라는 이름의 족속이 나온다. 동호는 만리장성 너머 몽골과 만주 일대에 걸쳐 살던 사람들을 포괄적으로 부른 명칭으로 보이는데, 여기에 몽골족이 포함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전국시대에 동호가 주로 교류한 나라는 연燕나라였는데, 동호는 4세기에 매우 세력이 강했던 것이 분명하다. 연의 장수 진개秦開가 동호의 인질로 잡혀 있었다는『 사기』의 기록이 그것을 말해 준다. 동호 역시 흉노처럼 야금술과 궁술, 기마 전투술이 뛰어났고, 진개는 인질로 있는 동안 동호의 앞선 기술을 열심히 배웠다고 한다. 연나라가 쌓은 장성은 바로 이 동호를 막기 위한 것이었다.

몽골 일대의 동호는 한대에 흉노의 묵돌선우에게 패한 후(BCE 209년) 약화되었다. 그 후 동호라는 이름은 사서에서 사라지고 선비鮮卑, 오환烏桓으로 바뀌어 등장한다. 선비보다 약했던 오환은 삼국시대 조조의 공격으로 붕괴되어 조씨 권력의 기동부대로 전락하였다. 이것이‘ 오환돌기烏桓突騎’ 부대이다.

선비족의 영웅이었던 단석괴 이후 선비 제국이 붕괴되면서 여러 부족(탁발拓跋, 모용慕容, 유연柔然, 거란契丹, 실위室韋)이 분립하였는데 이들 중 앞의 세 부는 앞에서 언급한 대로 강력한 국가를 건립하였다. 거란은‘ 키탄’이라 불리는데, 거란의 영웅 야율아보기는 10세기 초 요나라를 건국하였다.
야율아보기는 907년 천제를 거행하고 칭호를‘ 탱그리 카간’이라 하였다. 거란족에게도 카간은 천제의 대행자인 천자였다. 야율아보기는 곧 몽골고원을 장악하고 발해(대진국)을 멸망시켰다.

거란 제국은 이어서 현재의 북경과 대동 일대에 이르는 북중국을 장악하고 송나라와 대치하였다. 거란 제국은 거란족 외에 몽골계 유목민, 한족, 발해 유민, 여진족, 탕구트인 등 다양한 족속을 포괄하였다. 또 중국과 달리 발해의 5경 제도를 계승하였다. 거란 제국은 12세기 초 여진족의 금나라에게 멸망되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금나라에 의해 계승되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금나라는 여진족과 거란족의 연합정권이었기 때문이다.

몽골 제국을 세운 칭기즈칸(1162~1227)은 실위족에 속한다. 그러나 실위는 다양한 집단으로 나뉘어 있었다. 칭기즈칸이 등장하기 이전에 몽골초원 지역은 투르크계와 몽골계, 퉁구스계가 뒤섞인 다양한 집단의 상쟁으로 매우 혼란스러웠다. 이러한 집단 가운데‘ 울루스’가 세력이 컸는데, 칭기즈칸이 속한 울루스는‘ 몽골울루스’였다.

칭기즈칸은 19세에 몽골 울루스의 칸으로 선출되고 곧 동쪽의 타타르 울루스, 중앙의 케레이트 그리고 서쪽의 나이만과 메르키트 등 여러 울루스를 차례로 격파하고 통합하였다. 마침내 1206년 쿠릴타이(몽골 족장회의)에서 몽골 집단 전체의 카간으로 추대되었다.

칭기즈칸은 곧 눈길을 초원 밖으로 돌려 중앙아시아 일대를 정복하였다. 그의 아들들은 1222~1223년에 아조프 해 연안에서 러시아 군대와 싸워 이기고 1223년에는 키에프 공국을 공격하였다. 1227년 칭기즈칸이 사망하자 그 후계자들은 정복의 범위를 더 넓혔다.
칭기즈칸의 후예인 오고타이(2대 카간 1229~1241), 구유크(3대 카간 1246~1248), 몽케(3대 카간1251~1259), 쿠빌라이(4대 카간 1260~1294)는 정복사업을 계속하였다. 그리하여 중국 북부의 금나라를 정복하는 일이 급선무였다. 금의 멸망 후에는 네 방향으로 정복사업을 추진하였다.


유럽 원정(1236~242)을 수행한 다음 중동을 공격하여 카프카즈 지역과 셀주크 투르크를 속국으로 삼고(1243) 바그다드를 점령하였다.(1258) 고려도 1236~1241년에 걸쳐 몽골의 공격을 받아 그 지배하에 들어갔다. 1279년 남송을 멸망시킨 쿠빌라이는 섬나라인 일본과 자바까지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러나 동남아시아는 그 지배하에 들어갔다.

이렇게 하여 형성된 몽골 제국은 그 지배 지역이 매우 이질적이고 다양하였다. 그러나 효율적인 역참제를 통해 결속을 이뤄 낼 수 있었다. 몽골의 역참제는 제국 전역을 연결하는 조밀하고 광대한 교통 네트워크였다.
동으로 고려와 만주, 서로 중앙아시아를 거쳐 이란과 러시아에 이르는 교통로 상에 역참을 두었고, 남쪽으로는 안남과 버마까지 연결되었다. 역참에는 운송 수단인 말과 수레, 배를 갖추고 있었을 뿐 아니라 숙박시설도 있었고 패부牌符라는 증명서만 있으면 얼마든지 역참을 이용할 수 있었다. 이를 통해 문서와 서신, 관원과 공적 물자가 신속하게 이동되었다.

이러한 역참제를 기반으로 몽골 제국은 상업을 진흥시키는 정책을 펼쳤다. 몽골제국은 중국의 전통적 한족 왕조와 달리 상인을 우대했고 국제무역을 적극 지원했다. 심지어‘ 오르톡’이라는 상인조합에게 행정을 포함한 다양한 국가사업을 맡겼다. 또 통행세를 폐지하고 통상로를 안전하게 만드는 데 신경을 썼기 때문에 몽골 제국 시대에는 동서양 간에 교류가 매우 활발하게 이뤄졌다.

몽골 제국은 종교인에게도 관용정책을 취하여 각 종교의 지도자에게 면세 혜택까지 부여하였다. 페르시아나 중국 측 기록에도 남아 있듯이 이슬람·기독교·유대교·유교·불교·도교의 사제나 승려가 그러한 혜택을 누렸다. 이러한 정책에 힘입어 여태까지 국가의 탄압을 받던 소수 교단이 활력을 얻게 되었다. 중국과 중동에서는 네스토리우스파가 활발한 활동을 했고 유럽의 가톨릭도 적극적으로 선교사를 몽골 제국으로 파견하였다.

이러한 몽골 제국의 개방적인 동서교류 정책은 인류 역사상 어느 시기보다도 활발한 인적 왕래, 종교의 전파, 상품의 확산을 가져다 주었다. 이것이 소위‘ 팍스 몽골리카’의 실체였다. 이 시대에 위대한 여행기들이 나온 것은 이러한 팍스 몽골리카를 배경으로 한 것임이 틀림없다. 이탈리아 상인 마르코 폴로는 서양인으로서 몽골 제국에 가서 쿠빌라이 칸의 신하로 살다가 귀국하여 견문록을 남겼다. 반대로 동에서 서로 가서 여행기를 남긴 사람들도 있는데,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장춘진인長春眞人(1148~1127)이다.

산동성 사람으로 도교의 도사이던 그는 칭기즈칸의 부름을 받고 몽골군의 원정에 종군하였다. 알타이산을 넘어 천산북로를 따라 사마르칸트에 갔고 후에 남쪽으로 힌두쿠시 산맥을 넘었다. 장춘진인의 기행문은 『장춘진인서유록長春眞人西遊錄』으로서 13세기 몽골 제국 시대의 동서교통에 대한 귀중한 자료이다.

이처럼 몽골이 주도하던 13~14세기 때에는 동서 간에 활발한 교류가 있었고, 이러한 교류는 다시 근대를 열어가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요컨대 몽골 지역을 중심으로 한 북방 지역에서 일어났던 흉노, 선비, 돌궐, 몽골 등 여러 족속은 상고 시대에 우리 민족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을 뿐 아니라 그 후대에 이르기까지 세계사의 흐름을 이끈 주도 세력으로서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찬란한 청동기 문명을 꽃피운 고조선
현재 한국의 주류 사학계는 한국의 청동기 시대가 기껏해야 BCE 1300년을 거슬러 올라가지 못한다고 본다. 그러나 고조선은 나라가 막 세워진 BCE 24세기에 벌써 고도의 청동기 문명을 꽃피운 나라이다. 주류 사학계의 논리에 의하면 청동기 시대 이전인 BCE 2333년에는 국가가 있을 수 없다. 청동기 단계에 이르러야 고대 국가가 출현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청동기가 고대국가 성립의 필요조건은 아니다. 중남미의 경우 청동기가 등장하기 이전 석기만 사용하면서도 고대국가를 건설하였고, 4천5백 년 전에 이루어진 고대 이집트 왕조도 청동기 문명에 기초하여 성립된 것이 아니었다. 후기 베다시대(BCE 1000∼BCE 600)에 나타나기 시작한 인도의 통일 국가도 청동기의 영향을 받지 않은 것으로 밝혀졌다.

앞에서 소개한 하가점하층문화(BCE 2400~BCE 1500)의 비파형 동검은 청동과 아연의 합금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납 성분이 많아 단단하지 못한 중국의 검들과 다르다. 비등점이 서로 다른 청동과 아연을 합금하는 데는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고조선의 청동기 수준은 매우 높았음을 알 수 있다. 고조선의 문명 수준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유물이 있다.

BCE 4세기경에 만들어진 직경 21cm 안에 0.3mm 간격으로 13,000개에 이르는 가는 선을 넣은 다뉴세문경(여러꼭지 잔줄무늬 거울)이다. 선의 굵기가 머리카락 한 올에 불과한 이 청동 거울은 전 세계를 통틀어 오직 고조선 문화권에서만 발굴되었다. 고조선은 당시 동북아 문명의 주역으로서 고도의 청동 문명을 꽃피운 선진국이었던 것이다.

고조선의 거석 "고인돌"
고조선은 높은 수준의 청동기뿐 아니라 거석 유적에 속하는 고인돌도 많이 남겼다. 고인돌은 신석기 시대와 청동기 시대에 나타난 돌무덤 형식의 하나로 동북아시아와 서유럽 일대에 걸쳐 많이 나타난다.

아시아에서는 특히 고조선의 영역이었던 만주와 한반도에 많이 세워졌다. 한반도의 경우 정확한 숫자를 모를 정도로 고인돌이 많은데 대략 4만 기 정도로 추정된다. 전북 고창처럼 100여 기 이상의 고인돌이 떼를 지어 나타나는 곳도 있다. 고인돌에 들어가는 판석의 무게는 적게는 10톤에서 많게는 300톤에 이른다. 거대한 판석을 떼어 내어 무덤까지 옮기려면 수백 명의 인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고인돌을 세운 고대 문명은 상당히 조직화된 사회를 전제로 한다.

고인돌의 모양은 음양론에 바탕을 두고 있다. 뚜껑돌은 양으로 하늘(아버지)을 상징하여 1개이고, 받침돌은 음으로 땅(어머니)를 상징하여 2개로 이루어졌다. 뚜껑돌, 받침돌, 피장자는 각기 천, 지, 인을 상징하여 삼재 사상도 나타내고 있다. 고인돌은 무덤으로 시작되었지만, 무덤뿐 아니라 제단이나 마을의 상징물 구실도 하였다. 제단 고인돌은 주로 독립적으로 나타나는데, 시신을 묻었을 것으로 보이는 무덤방이 없다.

그런데 고조선의 주무대였던 만주와 요서의 고인돌도 그 형성 연대가 오래되었겠지만, 한반도에서 발견된 고인돌만 해도 그 연대가 BCE 2000년 이전의 것으로 측정된다. 하지만 국내 학자들은 방사능탄소 연대측정 결과를 받아들이지 않고있다. 이런 태도는 단군의 고조선 건국을 신화로 보는 관점과 직결되어 있다.

고조선의 생활문화 - 고조선의 언어
고대문명을 이루는 중요한 조건 중 하나가 문자의 사용이다. 고조선 이전에 배달을 건국했을 때 우리 민족은 이미 문자생활을 영위하였다. 『태백일사』「 소도경전본훈」에,“ 환웅천황께서 신지 혁덕에게 명하여 녹도(사슴 발자국 모양)의 글로써 천부경을 기록하게 하였다”라고 한 것을 보면 배달 시대에 녹도라는 문자를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3세 가륵단군이 새 글자를 만들기 전, 고조선 시대에 있었다고 하는 진서眞書라는 상형문자가 바로 녹도문으로 여겨진다.

BCE 2181년에 가륵단군은 그 진서가“ 해독하지 못할 정도로 어려웠다”라고 하며, 삼랑三郞 을보륵乙普勒에게 명하여 정음 38자를 만들게 하였다『( 단군세기』,『 태백일사』「 소도경전본훈」). 이로써 고조선의 새로운 문자, 가림토加臨土가 탄생하였다.

그런데 가림토 또는 가림다加臨多라고 불리는 이 글자의 모습은 조선 세종 때 만든 한글과 그 형태가 같거나 흡사하다. 특히 모음 11자는 똑같이 생겼다.

최근 중국 곳곳에서 은나라 갑골문 이전의 문자로 추정되는 상고금문이 발견되고 있다. 이것을 연구한 중국 학자 뤄빈지駱賓基는 자신의 저서『 금문신고金文新攷』에서‘ 상고금문은 한민족의 언어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문자’라고 밝히면서, 그 문자를 만들어 사용한 주체를 동방 조선족이라고 단언하였다(김대성,『 금문의 비밀』). 상고금문이 은나라의 갑골문, 주나라의 대전大篆, 진나라의 소전小篆을 거쳐 지금의 한자로 완성된 것을 볼 때, 한민족의 문자가 바로 중국 문자의 원형인 것이다.

고조선의 의식주
초대 단군왕검이 하백의 딸을 왕후로 맞이하여 잠업(누에치기)을 관장하게 한 기록『( 단군세기』)으로 볼 때, 고조선 이전 배달 시대 때부터 한민족은 옷감을 생산하는 능력을 갖추었다. 고고학적으로 북한과 만주의 신석기와 청동기 시대 유적에서 발견되는 양잠의 증거물로 보아도, 고조선은 상당한 직조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다.

고조선 후기 유적인 중국 길림성 후석산猴石山 유적에서 출토된 방직기를 사용하여 짠 마포는 당시의 높은 직조 수준을 보여준다. 이 유적에서 또한 옷을 장식하던 청동 단추를 비롯한 여러 치장용품도 발견되었는데, 이것은 고조선 사람들이 옷을 만들어 단추도 달고 다양하게 치장하였음을 보여준다. 고조선에서는 삼베, 모직, 명주 등의 옷감이 생산되었다.

『삼국지』「 부여전」을 보면,“ 부여 사람들은 흰색 옷을 숭상하여 흰 베로 만든 큰 소매가 달린 도포와 바지를 입고 가죽신을 신었다”라고 하였다. 이 기록은 부여의 의복 문화를 말한 것이지만, 부여는 고조선을 계승하였으므로 고조선의 복식도 이와 큰 차이가 없었을 것이다. 복식 문화에서도 백색의 광명 사상을 중시한 한민족의 신교 문화를 느낄 수 있다.



고조선인들의 식생활과 주거 문화는 어떠하였을까?
평양시 남경유적에서 5천 년 전의 탄화미가 한 구덩이 안에서 대량으로 발견되었다. 이 벼의 종자는 현재 우리가 먹는 쌀과 같은 단립종短粒種이며 야생 벼가 아닌 재배종으로 판명되었다. 이것은 고조선 이전부터 한반도 땅에 벼농사가 정착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고조선 사람들은 벼 외에도 조, 기장, 콩, 팥, 피, 수수 등의 잡곡도 재배하였다. 또한 돼지·소·말·양·닭 등 집짐승도 기르고 사냥으로 산짐승을 잡아, 고기와 가죽을 이용하였다.

『한서』「 지리지」에 의하면, 고조선에서는 나무로 만든 그릇을 사용하였다. 고조선 시대 유적지에서 나무 외에 바리, 접시, 굽접시, 시루, 단지, 항아리 등 여러 가지 그릇이 나오는데, 이것은 다양한 음식을 만들어 먹었음을 말해준다.

고조선의 주거 문화에서 특히 눈여겨 볼 것은 한민족 고유의 난방시설인 온돌이 고조선 후기 유적에서 발견되었다는 점이다. 함북 웅기와 평북 강계, 자성, 영변 등의 당시 주거지 유적에서 구들 형태가 확인되었다.

고조선의 예악禮樂
고조선은 제정일치祭政一致 국가였기 때문에 일찍이 예악이 발달했다. 만주 요령성에서 BCE 2000년경 것으로 추정되는, 궁중 음악이나 제사 의례에 사용된 악기인 석경石磬과 편종이 출토되었다. 또한 두만강 유역에서 BCE 2000년 전반기의 뼈피리가 발견되었다.

그런데 앞서 살펴보았듯이, BCE 3000년경 배달 시대의 유적인 홍산문화에서 고조선 것보다 더 오래된 석경이 출토되었다.

홍산문화에서는 오공금五孔琴이라는 옥으로 만든 악기도 발견되었다. 홍산문화와 고조선 유적에서 출토된 뼈피리, 석경, 오공금 등의 악기로 볼 때, 동방 한민족은 동북아에서 가장 먼저 예악禮樂 문화를 누린 민족이다.

현대인이 유행가를 즐겨 부른다면, 고조선 사람은 제천가를 즐겨 불렀다. 매년 삼신상제님께 천제를 올릴 때 나라에 큰 축제를 열어 모두가 한마음으로 상제님의 덕을 찬양하며 <어아가於阿歌>라는 제천가를 불렀다. 감탄사 어아於阿로 시작되는, 2세 부루단군이 지은 이 노래는 한마디로 삼신을 맞이하는 노래이다.

<어아가>는 후일 고구려 시대에 이르러『 참전계경參佺戒經』 속에 수렴되었다.『 참전계경』은 고구려 9세 고국천열제 때 재상인 을파소가 백성들의 인성 교육을 위해 지은 경전으로, 신교 문화의 3대 경전 가운데 하나이다.

그리고 고조선 시대에는 사람들이 악기도 즐겨 다루었다. 공후箜篌(서양 하프 모양의 현악기)라는 악기를 연주하며 부른 노래인 <공무도하가公無渡河歌>가 널리 퍼져나간 것에서 이를 알 수 있다. 고조선에서 흔한 악기였던 공후는 BCE 106년쯤 중국 한나라에 전해졌다. 고조선은 한마디로 동방 예악 문화의 고향인 것이다.

고조선 삼한관경제(진한, 번한, 마한)의 와해와 쇠망
동북아의 천자 나라로 발전을 거듭하던 고조선은 21세 소태단군(BCE 1337~ BCE 1286) 말기 무렵, 개국 이후 첫 번째 국가 위기상황을 맞이하였다. 국가 운영의 근간인 삼한관경제가 큰 타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상나라 정벌에 공을 세운 개사원 지역의 욕살褥薩(지방장관) 고등高登과 해성 욕살 서우여徐于餘의 권력투쟁이 그 발단이었다. 순행 길에 옥좌 이양 의사를 밝힌 단군은 서우여에게 제위를 넘기고자 하였다.

그러나 고등의 손자 색불루索弗婁가 군사를 일으켜 스스로 보위에 오르는 바람에 어쩔 수없이 색불루에게 국새를 넘겨주었다. 이에 서우여가 마한, 번한의 군대와 연합하여 색불루에게 강력히 저항하면서 삼한의 군대가 서로 싸우는 내전이 발발하였다. 다행히 두 사람 사이에 정치적 타협이 이루어져서 내전은 가까스로 종결되었지만, 자칫 삼한관경제가 붕괴될 수 있는 위기를 겪었다.

정권을 탈취한 22세 색불루단군(BCE 1285~ BCE 1238)은 백악산 아사달로 천도하여 고조선의 제2왕조시대를 열고 국정쇄신을 위해 삼한(진한, 번한, 마한)을 삼조선(진조선, 번조선, 막조선)으로 바꾸었다. 삼조선 체제에서도 여전히 진조선만 병권을 가졌지만, 이미 예전의 삼한관경제가 아니었다.

22세 단군은 정국을 안정시키고자 8조금법을 제정하였다. 8조금법은 여덟 가지 죄의 종류와 각 죄에 대한 처벌을 정한 삼성조 시대 최초의 성문법이다. 법규의 제정은 강력한 통치 체계를 갖춘 고대 국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주기도 하지만, 고조선의 사회 분위기와 경제 질서가 그만큼 어수선해졌음을 나타낸다. 당시 고조선은 신교 문화의 성소聖所인 소도를 중심으로 한 공동체 의식이 약해지고 빈부 격차와 계급 분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다.

43세 물리단군(BCE 461~ BCE 426) 때에 이르러 삼한관경제가 완전히 붕괴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사냥꾼 우화충于和沖의 역모 사건이다. 장군을 자칭한 우화충이 무리를 이끌고 도성까지 공격해 오자, 피난에 나선 단군은 도중에 붕어하고 말았다. 이때 반란군을 평정하기 위해 욕살 구물丘勿이 장당경에서 군사를 일으켰다.

구물은 도성에 큰물이 들어 혼란한 틈을 이용하여 반란군을 평정하고 44세 단군(BCE 425~ BCE 397)으로 즉위하였다. 장당경 아사달에서 고조선의 제3왕조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 구물단군은 국력 회복을 위해 국호를 대부여大夫餘로 바꾸었다. 또 천제를 올려 삼신상제님의 보살핌을 간절히 하소연하였다. 제도를 고치고, 아홉 가지의 맹세(九誓之盟)를 정하여 백성들의 화합과 교화도 도모하였다. 하지만 대부여는 예전의 진한 또는 진조선과 같은 막강한 통치력을 행사할 수 없었다. 부단군이 다스리는 두조선도 병권을 가지게 되어, 쇠약해진 진조선과 대등한 관계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로써 약 2천 년 동안 고조선을 지탱하던 삼한관경제는 거의 와해 직전에 이르렀다. 이때부터 고조선은 급속하게 쇠락의 길을 걸었다. 45세 여루단군(BCE 396~ BCE 342) 이후 고조선과 국경을 접한 연나라의 침입이 끊이지 않았고, 46세 보을단군(BCE 341~ BCE 296) 때는 번조선 왕해인解仁이 연나라 자객에게 시해를 당하기도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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