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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4-06-21 20:49
문창극 강연에 인용한 친일파 윤치호 일기?
 글쓴이 : 이성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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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창극 강연에 인용한 친일파 윤치호 일기와 ,,, 또 다른 친일적인 일기 내용등 [펌]
기독교인 윤치호 일기을 읽어 보시면 동영상 요지의 맥락에 각자 느낀점이 있을것 입니다.
더럽다 게으른DMA 해충이 득실된다. 이방 800명 말등은 선교사의 말과 윤치호 일기을
인용한 것으로 일제 식민지배와  6.25전쟁은 하나님의 뜻은 이런 바탕위에서 말한 것 같으다.    
 
 
 
내나라 자랑할 일은 하나도 없고, 다만 흉 잡힐 일만 많으매 일변 한심하며, 일변 일본이 부러워 못견디겠도다.  윤치호일기 1888년 12월 29일자
 
조선이 지금의 야만적 상태에 머무느니 차라리 문명국의 식민지가 되는 게 낫겠다' 윤치호일기 1890년 5월 18일자
 
만약 내가 마음대로 내 고국을 선택할 수 있다면, 나는 일본을 선택할 것이다. 오, 축복받은 일본이여! 동방의 낙원이여!  1893년 11월 1일자 윤치호 일기
 
수치스러운 조선역사에 대하여 더 알면 알수록 현 왕조하에서는 개혁의 희망이 없음을 확신하게 된다. 정부는 500여년간 국가의 향상을 위하여 아무것도 한 일이 없다.
 
지난 수년 동안에 일어났던 일련의 사건들의 불가피한 결과였다. 나는 한국의 모든 고난을 만든 운명의 여신(the Author and Finisher) 외에 아무도 비난하지 않는다.며 윤치호는 독립의 상실과 일본의 폭정을 수반하게 될 을사 조약을 열강의 침탈경쟁인 러일전쟁의 불가피한 귀결이며, 개혁과 개선을 무조건 외면해온 한국인들에 대한 역사의 심판 또는 신의 심판으로 인식되었다.
 
3.1운동 이번 운동에 반대하는 세 가지 이유는 이렇다. 조선 문제는 파리강화회의에 상정되지 않을 것이다. 어떤 나라도 조선독립을 위해 일본과 싸우는모험을 감행하지는 않을 것이다. 약자가 취할 수 있는 최선의 방책은 강자의 호감을 사는 것이다. 1919년 3월 6일 윤치호 일기
 
강자와 서로 화합하고 서로 아껴 가는 데에는 약자가 항상 순종해야만 강자에게 애호심을 불러일으키게 해서 평화의 기틀이 마련되는 것입니다마는, 만약 약자가 강자에 대해서 무턱대고 대든다면 강자의 노여움을 사서 결국 약자 자신을 괴롭히는 일이 됩니다. 그런 뜻에서도 조선은 내지에 대해서 그저 덮어 놓고 불온한 언동을 부리는 것은 이로운 일이 못됩니다.윤치호 경성일보 1919년 3월 7일
 
동양의 런던'으로 불리던 상하이에서 망명생활을 하던 윤치호는 더럽고 냄새 나는 중국인을 보며 조선인의 미개한 삶을 더욱 부끄럽게 생각했다. "청인(淸人)의 집은 음침하기 측량 없어 일본 사람의 정결하고 명랑한 집에 비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람의 똥뒷간 같은 집이야 어찌 청인의 2층집에 비하겠는가."
 
외국인을 초청해서 한식을 대접할 때면 창피해서 낯을 붉히게 된다. 버젓한 음식점 하나 운영할 수 없는 사람들이 독립국가를 경영하길 원하니,나 원 참 기가 막혀서  1920년 1월 13일 윤치호 일기
 
우리가 일본인들을 함부로 경멸할 자격이 있는가? 어디 한번 생각 좀 해 보자. 일본인들은 깔끔하기로 유명하다. 우리는 불결하다고 소문이 나 있다. 그들은 부지런하기로 유명하다. 우리는 게으르다고 소문이 나 있다. ...(이하 중략)... 우리 입장에서 최선의 행동은 일본인들의 뛰어난 자질을 가능한 한 많이 배우고 모방하는 것이다. 그들의 청결성, 근면성, 협동심, 기강, 응집력 등을 말이다.
1920년 7월 26일자. 윤치호 일기
 
난 이 얘기를 듣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참말이지 애통한 일이다. 조선인들은 이토 히로부미의 암살이 한일 병합을 재촉했다는 걸 잊었단 말인가. 바보들 같으니하면서... 석호필이 "하나님은 조선사람에게 나라와 긴 손톱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도록 주셨는데 조선사람은 긴 손톱을 택하고 나라를 버렸다."고 한 것을 두고 조선인들의 게으름이 스스로 나라를 멸망시킨 것을 적절하게 표현한 것이라며 감탄하기도 했다.
 
윤치호의 아버지인 윤웅렬 역시 1880년부터 근대화를 위해 친일 성향을 띠기 시작했다. 이 성향은 특히 그가 1882년에 발생한 임오군란 후 일본으로 망명하면서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윤치호는 청일전쟁 후 들어선 김홍집 내각에서 군부대신을 지내기도 했다. 1910년, 일제의 조선 강점 이후 일본으로부터 남작 작위와 공채 2만 5000원을 받기도 했다.
 
윤치호는 3월 2일자 일기에서 학생들의 소요는 무단통치를 연장시킬 뿐이라고 했다.그들의 행동처럼 “만약에 거리를 누비며 만세를 외쳐서 독립을 얻을 수 있다면, 이 세상에 남에게 종속된 국가나 민족은 하나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3·1 운동 당시, 국민대표로 서명을 권유받았으나 거절했고, 3월 7일 기자 회견을 통해 다음과 같은 담화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강자와 서로 화합하고 서로 아껴 가는 데에는 약자가 항상 순종해야만 강자에게 애호심을 불러일으키게 해서 평화의 기틀이 마련되는 것입니다마는, 만약 약자가 강자에 대해서 무턱대고 대든다면 강자의 노여움을 사서 결국 약자 자신을 괴롭히는 일이 됩니다. 그런 뜻에서도 조선은 내지에 대해서 그저 덮어 놓고 불온한 언동을 부리는 것은 이로운 일이 못됩니다.” (경성일보 1919년 3월 7일) 
 
이 상황에 대해서, 일부 학자는 그 당시에, 윤치호가 '독립이 불가능하며 일제에 저항을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고 주장한다. 자신의 일기에도 "나는 국경일에 일장기를 게양하는 것을 반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가 일본의 통치하에 있는 한 우리는 그 통치의 명령에 복종해야 하기 때문이다" (윤치호 일기, 1919년 10월 1일)라고 썼다.
 
1937년,중일전쟁이 일어나자 국민조선총독력연맹에 참가하고 미나미지로의 찬성에 하고 1939년에 우가키의 중화민국과 합동하는 협상에도 반대하고 우가키 총독의 전 친일세력이 조금 약한 농촌 진흥운동을 가졌다.
 
1938년 5월 결성된 경성기독교연합회 평의원으로 선출되었고, 6월 기독교일본화를 달성하기 위해 소집된 전조선기독교청년연맹위원회에 참가한 후 "이제야 대임(大任)을 마쳤습니다. 우리 기독청년들도 이제는 완전히 내선일체가 되었습니다"라는 요지의 담화문을 발표하였다.
 
황국신민화 실천운동의 조직체인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 창립총회 준비위원 및 상임이사로 선정된 윤치호는 창립식에서 "천황폐하 만세"를 세 번 외치기도 했다.
 
황민화운동을 거쳐 농촌계몽운동과 사회주의,광복군,독립군,임시정부,경학사,동제사 등을 해산시키고 창조파,개조파도 해산하고 조선총독대회와 조선력강연대회에 참가하였다.
 
국민참가조선참가댁회 사장을 거쳐 국민조선총독력대회를 피고 조선어학회사건,수양동우회사건을 맡았다. 한편,청구구락부,수양동우회,흥업구락부와 활동도 했지만 1945년에는 일본 귀족원 의원을 지냈다. 1945년 2월 일본 제국의회의 칙선 귀족원 의원에 선임되었다. 2월 박춘금이 결성한 대화동맹(大和同盟) 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
 
4월 3일 다시 일본 제국의회 칙선 귀족원 의원에 재선임되었다. 1945년 4월 '조선내 7인의 일본 귀족원 의원' 중 한 사람으로 선출된 윤치호는 박중양 등과 함께 일본의 '망극한 처우개선'에 감사하고자 조직된 처우감사 사절단 대표사절로 선임되었다.
 
이어 박중양이 윤치호를 수행하여 인천항에서 배편으로 일본을 방문하였다. 윤치호는 먼저 조선신궁에 봉고제를 올린 후 총독과 군사령관을 방문하여 감사를 표하였다.
 
이어 서울을 출발, 일본으로 간 윤치호는 일본 관계 요로에 감사를 표한 후 귀국하였다. 1945년 6월 조선언론보국회 고문으로 재추대되었다. 8월 10일 광복 직전, 그는 개성의 광문암동 근처에 우거하고 있었다.
 
1945년 12월 9일 오후 4시 경기도 개성부 송도면 고려정(開城府松都面高麗町) 자택에서 뇌일혈로 갑자기 사망하였다고도 하고 독립 후 친일파로 규탄받자 그의 병세가 악화되었으며, 시중에는 친일파로 몰리자 슬퍼하여 자살한 것으로 알려졌었다.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5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1차 명단에 모두 선정되었다. 연세대학교 교내 단체가 선정 발표한 '연세대학교 친일파 명단'에도 들어 있다.
 
 
좋은 평가:
대학교수 겸 언론인 강준만은 한국근대사산책 3권 에서 그가 수구반동세력에게 타협하였지만 뒤에도 계속 독립, 계몽운동에 투신한 것에 대해 "윤치호가 현실에 굴복해 변절했을망정, 그에게 국가·사회를 생각하는 그런 정신은 남아 있었던 것이다"라고 평가하였다. 그에 의하면 "그래서 윤치호는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즉시 관직을 버리고 애국계몽운동에 뛰어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독립협회 실패 이후로 민중의 우매함이 개혁, 계몽의 실패의 원인으로 봤고 이후 독립운동에도 회의적인 입장을 취하게 된다.
 
대학교수이자 역사학자인 이주영은 그를 이승만과 함께 지난 1세기 동안 한국의 역사에서 개신교문명 개화의 연결 고리가 가장 확실하게 드러난 대표적 인물로 평가하기도 했다. 이주영은 윤치호에 대해서 “서구 문명을 여러 차례 접하면서 문명사회는 곧 민주사회기독교 사회라는 점을 알게 됐고, 한국주권을 잃자 기독교 교육을 통한 개인의 경제적·정신적 ‘주체 없는 문명화’의 파멸이었다. 자립을 운동의 방향으로 설정했다”고 평했다. 이주영 교수는 '윤치호가 오늘날에 살았더라면 대통령이 되었을 큰 인물이었다. 라고도 평가하였다.
 
 
비판 평가:
서울대학교 교수 김상태는 "윤치호는 일제식민지 조선에끼치는 해악을 분명히 인식했으면서도, 성악설에 대한 믿음으로 인해 스스로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의식을 무장해제하고 만 것이다. 이런 판단 아래에서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정치적 입장은 현상유지, 곧 현실 순응일 수밖에 없었다. 고 비판적 견해를 보였다. 수유연구실 윤영실 연구원은 "문명만이 절대 선이고 문명을 위해서라면 강대국에의 종속도 불가피하다는 신념에 따라 미국을 선망하고 조선에 열등감을 가졌던 윤치호가 결국 당시 동양의 문명국 일본에서 타협을 본다. 고  평을 내리기도 했다.
 
나약한 지식인이라는 비판이 있다. 그밖에‘주체 없는 문명화’의 파멸이었다. 는 비판도 있다. 정운현은 결론적으로 말해 그는 조선(한국)의 잠재역량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한데다 식민지라는 ‘상황논리’에 빠진 나머지 결국 일제와 타협하고 말았다. 그의 친일은 갑작스런 변신이 아니라 해외유학 경험을 통한 자기확신에서 비롯한 것이다. 그의 친일행적보다도 친일논리에 눈길이 쏠리는 것 은 바로 이 때문이다. 라고 평가했다. 정운현은 그가 '지식인으로서의 ‘반성’은 차치하고 기독교인으로서의 ‘참회’ 한마디도 없다. 명색이 독립협회 회장과 <독립신문> 사장을 지낸 그가 해방 후 남긴 ‘자기고백’은 겨우 이런 모습이다. ‘일본스코틀랜드화(化)’가 조선이 살 길이라며 일제의 ‘우호적인 식민통치’를 기대했던 그의 나약한 역사관이 결국 그를 친일의 길로 안내하고 만 것이다. 라는 비판을 남기기도 했다. 또한 '주체 없는 문명화'의 파멸 이라는 부정적인 시각도 존재한다.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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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창극 강연은 논문이라면 표절수준이여 종교적인 역사관은 국무총리로는 부적격자로 보인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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